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 국회부의장 시절의 조봉암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 미상(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1918년 12월 초 신문에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리고 여기에 일본대표의 파견과 일본정부의 외교방침 등이 보도되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평화원칙 14개조 등이 평화회의에서 논의 될 것이라는 기사였다. 물론 신문은 민족자결원칙이 유럽의 폴란드ㆍ불가리아ㆍ체코슬라비아 등 민족문제처리에만 적용되는 듯이 쓰고, 한국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즈음 국제정세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종전되면서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일본은 중국에 있어 이권 확대를 노리고 영일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중국 산동성의 독일 이권을 물려받고 남양제도의 위임통치령을 얻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혁명으로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비에트정부는 지주의 소유지를 국유화하고 은행ㆍ산업의 노동자 관리에 착수했으며 독일과의 단독강화에 의해 평화체제를 갖추었다. 러시아 신정부는 권내의 다민족을 포용한 채로 자결권을 승인하고, 민족자결 원칙을 제시하면서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였다.

윌슨은 1918년 1월 의회에 <14개조 평화원칙>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① 강화조약의 공개와 비밀외교의 폐지 ② 공해(公海)의 자유 ③ 공정한 국제통상의 확립 ④ 군비축소 ⑤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⑥ 프로이선으로 부터의 철군과 러시아의 정치변화에 대한 불간섭 ⑦ 벨기에의 주권회복 ⑧ 알자스 로렌의 프랑스 반환 ⑨ 이탈리아 국경의 민족문제 자결 ⑩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의 자결 ⑪ 발칸제국의 민족적 독립보장 ⑫ 터키제국 지배하의 여러 민족의 자치 ⑬ 폴란드의 재건 ⑭ 국제연맹의 창설 등이다. 

각 민족은 그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며 외부로부터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민족자결주의는 19세기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함께 약소민족의 자주독립사상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제1차대전 결과 독일ㆍ터키ㆍ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되고, 그 판도에 있었던 종속민족들의 처리문제가 시급한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윌슨의 '14개조 원칙'은 이같은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주석 3)

미국 유학을 중단한 채 기회를 노리던 신익희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놓칠 리 없었다. 

그 해 6월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발표한 강화 원칙 가운데에 '민족자결'의 한 항이 있는 것을 기회로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 사회의 지명 인사이고 지도자급이던 우정 임규ㆍ고우 최린ㆍ고하 송진우ㆍ육당 최남선ㆍ정노식ㆍ창석 윤홍섭ㆍ공민 나경석 등과 비밀히 의논하는데 혹은 남의 집 건넌방에서 모이기도 하고, 당시 요리점이던 혜천관ㆍ명월관 등지에 모여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게 되었다. (주석 4)

신익희는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행동에 나섰다. 당대의 각계 명사들을 은밀히 만나고 전략을 숙의했다. 손병희에 의해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하여 승세를 타고 있는 천도교와 기독교ㆍ불교 등 종교계가 함께 나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책임을 맡았다.

소격동 어느 게딱지같이 낮은 집 건넌방에서 남강 이승훈을 만나서 세계 대세와 우리가 일어날 기회라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끝까지 듣고 있다가 그는 단번에 "나는 세계 대세는 모르겠으나 일평생을 일본 놈이 싫어하는 일이면 골라서 하던 터이니, 일본이 싫어하는 일이면 하겠소이다." 하며 허리띠에 차고 있던 염낭에서 까무족족한 목도장을 꺼내 놓으며 찍으라고 하는데 그 순결하고도 견결한 표정과 태도에 나는 깊이 감격하였다.

다음 좌옹 윤치호를 종로 청년회관으로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가 출입문을 잠그고 왔다. 다시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여러 시간이나 하였는데 그는 기회가 아니라고 사절하였다.

그 밖에 구한말 관위에 있던 분들에게는 순종비 윤 황후의 오라버지인 동지 창석 윤흥섭이 교섭하였는데 모두 실패하고 필경은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 예수교의 남강 이승훈, 불교의 만해 한용운 등 33인이 서명하게 된 것이다. (주석 5)

민족사의 대변곡점이 되는 3ㆍ1혁명은 이렇게 마그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하이에서 여운형ㆍ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국내의 독립운동가와 연결하고자 장덕수를 파견하여 신익희와 만나 연계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조직했던 '조선학회'의 멤버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밀사로 들어왔다.


주석
3>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223쪽, 채륜, 1917.
4> 「구술 해공자서전」, 59쪽.
5> 앞의 책, 6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