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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신익희(1894~1954)
 해공 신익희(1894~1954)
ⓒ (사)해공신익회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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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가 일본에서 겪고 놀란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도 국민의 교육열이었다. 곳곳에 신식 학교가 세워지고 근대적 교육이 실시되었다. 조선에서는 마을에 구식 서당이 더러 있을 뿐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름방학(1913년)에 고향집의 사랑채에 '광동강숙'을 열었다.

인근 마을에서 80여 명의 아동이 모였다. 직접 지은 〈건교 취지문〉에서 그의 교육정신을 살필 수 있다. 한문에 한글로 토(吐)를 단 것인데, 여기서는 한글만 소개한다.

건교 취지문

 씨앗과 묘를 땅에 심고는
 김 매지 않고 북돋아 주지 않고서
 그 묘가 자라지 않는다고 탓함은
 사람을 가르치지 않고, 훌륭하게 성장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소냐.
 오호라. 하 나라의 대학이나 주 나라의 학교의 번성은 가상할 일이다.
 뛰어난 재주 있는 사람을 얻어 가르친다는 일은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맹자가 말씀 하셨고,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경서에 통달하였음이
 한 나라 종실의 융성을 기했다.
 그런 까닭에 현에 학교, 시골에 향학, 가정에 글방이 있어서
 신념에 안주하며 신명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도록 깨달아 알게 해야 하나니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는 학문하도록 권장하는 데 있나니
 부지런해야 하고 힘드는 일로서 이 일을 돕는 자 또한 진실하게 도와야 한다.
 미욱한 남녀라도 의리에 있어서는 사양하지 않음은
 타고난 본디의 떳떳한 성품이 똑같은 까닭이니라.
 생각하건대 이 동리는 광주 땅 동쪽에 치우쳐 있고,
 백 집이 채 못되는데 백성은 비록 미욱하고
 살림 형편은 가난하고 옹색하기가 군내에서 으뜸인데
 다행하게도 백성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정을 천도가 알아 주고
 지금 세상이 배움의 열기가 일어남에 매우
 고맙게 느끼는 바 있는 데다가
 그 관할 관청의 인권의 소리도 있고 하여
 서로가 작은 돈을 거두어서 조그만한 글방을 설립하고
 이름 하기를 '광동강숙'이라고 지었다. 
 앞으로 오래오래 튼튼하게 가이없이 아득하게 유지하려면
 비록 뜻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는 유지가 어려우니
 무릇 큰 집을 짓는 일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힘에 힘입어야 할지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의 두터운 정의와 마음을
 함께 하는 정성으로
 한 마디 의견을 펴는 바이니 다행히 학문을 
 권장하는 마음과
 정의에 의지하는 미덕을 드리울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강숙의 터전을 세웠나니, 나라의 원기를 
 배양하고
 후진들의 성공의 길을 열어 인도해 나간다면
 옛 스승이 여기에 버금 가지 않을 것이니
 군자로서 학문을 즐기는 것은 후세에 그 영예가
 길이 남는 까닭이니라. (주석 4)


주석
4> 「구술 해공 자서전」, 116~11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 #신익희, #신익희평전, #광동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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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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