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상덕 독립투사가 다니던 무렵의 학생운동을 소개한 <건학 80주년 와세다대학 사진첩, 1963년>
▲ 사진첩 김상덕 독립투사가 다니던 무렵의 학생운동을 소개한 <건학 80주년 와세다대학 사진첩, 1963년>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다니던 학교가 졸업을 1년 앞두고 문을 닫고, 그보다 나라가 망하여 일본인들의 손에 모든 권세가 넘어가는 암담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비록 16세에 당한 국치이지만 감수성이 남다르게 예민했던 그에게 참담한 상황이었다. 

자라면서 고향 근처에 있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 앞에서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치욕의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바라보며 민족적인 치욕을 되삼키던 소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임금은 물론 2천만 동포, 3천리 강토가 왜놈에게 짓밟히는 식민지 시대가 되고 말았다.

망국의 통한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년여 동안 어머니를 모시면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형들과 장래 문제를 상의하였다. 두 갈래 길이었다. 청운의 꿈을 위해 해외유학의 길과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면서 눌러 앉느냐였다.

번민으로 매일처럼 긴긴 밤을 지새우던 해공에게 어느날 갑자기 희소식이 들려왔다. 외국어학교 동급생이며, 윤비(尹妃)의 동생이자 부원군(府院君) 윤덕영(尹德榮)의 아들인 윤홍섭(尹弘燮)이 일본 유학을 같이 가자며 후원을 제의해왔다. 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부 시절 윤홍섭은 공부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부원군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늘 서민적으로 처신하며 성품이 원만해 동문들간에 인기가 있었다. 

해공도 처음에는 그의 신분을 의식하고 가까이하기를 조심했지만, 그의 소탈한 성품을 알고는 곧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되었다. 그가 해공에게 막대한 학비를 대준 것은 그들의 우애와 신의의 명확한 증거였다. (주석 1)
<일본유학> 일본명문대학 와세다대학교

일본 동경 다카다노바바에 위치한 일본명문대학 와세다대학교
▲ <일본유학> 일본명문대학 와세다대학교 <일본유학> 일본명문대학 와세다대학교 일본 동경 다카다노바바에 위치한 일본명문대학 와세다대학교
ⓒ 김현지

관련사진보기

 
1910년대 초에 해외 유학이란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비록 합병된 나라라고 하지만 상전이 된 일본이고 학비와 물가가 비싸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윤홍섭은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신익희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보고 함께 가길 원한 것이다.

신익희는 고심 끝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2년 여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교재로 시험준비를 서둘렀다. 일본어를 익히고 공부한 끝에 가을에 명문이라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정치경제학부에 거뜬히 합격하였다.

이 대학은 1882년 시게노부가 동경전문학교를 창설한 것을 모태로 1902년 와세다대학으로 개칭하고, 설립자가 메이지유신 뒤에 입각하여 총리대신을 지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한국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와세다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다. 신익희가 와세다대학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정치경제학부에 적을 두고 정치학ㆍ법학ㆍ경제학ㆍ사회학은 물론 철학ㆍ문학ㆍ논리학ㆍ심리학 등 폭넓은 강의에 수강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학비는 윤흥섭의 지원을 받았으나 생활비까지 기댈 수 없어서 신문ㆍ우유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다.

신익희의 와세다대학 입학을 전후하여 송진우ㆍ장덕수ㆍ조소앙ㆍ최두선ㆍ백남훈ㆍ이광수ㆍ김성수ㆍ김준연ㆍ현준호 등이 들어오고, 학생이 늘어나면서 조선유학생 학우회에 이어 조선학회를 조직하였다. 
1890년대 와세다대학 주변은 논밭이었다.
▲ 와세다대학 주변 1890년대 와세다대학 주변은 논밭이었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안재홍ㆍ송진우ㆍ문일평ㆍ정세윤 등과 함께 조직한 해공은 처음에는 총무 일을 보다가 정세윤ㆍ박해돈ㆍ노실근에 이어 회장이 되었다.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을 편집하기도 하며, 고학생으로 누구보다 바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 유학시절 고학으로 학업에 몰두하는 틈틈이 학우회를 이끌어 나가는 가운데 어느 대학생도 해 내지 못할 일을 해공은 해나갔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나가고 밤이면 원고를 쓰거나 심지어는 신문 배달까지 해 가며 어렵게 고학을 했는데, 그러는 중에 적은 돈이지만 매달 생활비를 집으로 보내었다. 그는 또 가끔 새로운 계몽 서적이나 일용품 등을 집으로 보내는 성의도 보였다. 

또한 그는 도쿄 유학시절 유학생 모임에서 늘 총무나 회장직을 맡아 틈틈이 독립 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때문에 해공은 일본 학생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 잘 때면 베개 밑에 늘 칼을 넣어 두는 일도 있었다. 호신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석 2)

그는 학우회를 통해 일본에 유학중인 한인 학생들과 폭넓게 교우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행하여 비록 적국의 수도이지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1919년 2ㆍ8독립선언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윤흥섭 등 동지 10여 명과 혈서를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비밀결사 조선학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주석
1> 유치송, 앞의 책, 99쪽. 
2> 앞의 책, 10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