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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들이 1949년 활동했던 영동군 학산면 아암리 백하산.
 빨치산들이 1949년 활동했던 영동군 학산면 아암리 백하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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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아. 애들 데리고 피난 가 있거라." "예. 어머니." 머릿수건을 하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 정봉순을 바라보는 전정임(집 나이 20세)은 안타깝기만 했다. 1950년 7월 뙤약볕 속에서 왕복 100리(40km)를 걸어 다닐 어머니를 생각하니 정임은 울적해졌다. 하지만 큰오빠와 작은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러 다니는 엄마를 어찌 말리랴. 그날도 정임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 큰오빠의 자식들을 데리고 아암리의 여의산으로 피난을 했다.

정봉순은 비지땀을 흘리며 어서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영동 마차다리(현재 영동대교)를 지나 어서실에 가까워지자 악취가 진동했다. 머리에 맸던 수건을 풀어 코를 감쌌지만 악취는 여전했다. 어서실 골짜기에 가까워질수록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곳 어딘가에 큰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학살 현장에서 태어난 아기

그날이 벌써 세번째 걸음이었다. 정봉순은 금쪽같은 큰아들이 어서실에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이곳을 찾았다. 기다란 개울가에는 200여 구의 주검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봉순은 그날도 주검들을 일일이 살폈다.

시신들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고 피칠갑이어서 구분이 어려웠다. "아이고, 성님." 손윗동서 고장수(당세 38세)의 시체를 발견한 봉순은 곡을 했다. 그런데 한참 곡을 하고 보니 동서 고장수의 두 다리 사이에 웬 시키먼 물체가 보이는 게 아닌가? 가까이 가보니 다름 아닌 거무튀튀한 핏덩어리였다. 혹시나하는 생각에 그녀는 죽은 동서의 배를 보았다. 남산만 해야 할 배가 홀쭉해져 있었다. "아이고..." 정봉순은 다시 한번 곡을 터뜨렸다. 동서 고장수가 총살을 당하면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도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1950년 여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7월, 충북 영동군 영동읍 어서실 골짜기. 영동 CIC(특무대)가 영동경찰서 경찰들을 대동하고 어서실로 들어왔다. GMC 트럭에서 내린 3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은 뒷결박을 당한 채였다. 이후 CIC 간부의 손짓에 따라 영동경찰서 보도연맹 처단반원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한 열 10명의 머리가 쑤셔박히면 다음 열이 세워졌다. 좌익에서 전향하면 나라가 보호해 준다며 사람들을 모아 보도연맹을 만들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일순위 처형 대상이 됐다. 

총을 들고있던 처단반원 전필수(가명)는 움찍했다. 이번 대열에 선 사람 중에는 여성이 2명 있었는데 모두 배가 남산만 했다. 한 여성은 옆에 있는 남성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임산부의 남편인 학산면 아암리 사람인 전능표였다. 그들을 향해 '서서 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처단반원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영동 CIC 간부의 손이 주저 없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졌다. 하지만 차마 임산부에게 사격할 수 없었던 처단반원들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CIC 간부가 공포를 쏜 후 한 처단반원의 가슴에 총구를 겨눴다. "이 새끼들. 너네들이 죽고 싶냐!" 화들짝 놀란 처단반원들은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만삭의 고장수와 전능표의 처가 저세상으로 간 날은 1950년 7월 20일이었다.

"이 새끼. 똑바로 대답하지 못해!" 며칠째 경찰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전우달(1926년생)은 입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동경찰서 사찰과 형사의 취조는 계속됐다. "전우평(1920년생)이가 네놈한테 심부름을 시켰지" "네." 여기까지는 전우달도 순순히 대답했다.

경찰은 전우달의 육촌 형 전우평이 영동군 양산면에 중요 서류를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그에게 시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전우평은 영동경찰서에 검거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영동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양산면에서 누구랑 접선하려고 한 거야?" "모릅니다." "모르다니! 심부름을 한 놈이 누구랑 만나려고 했는지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저는 우평이 형이 심부름을 하면 용돈을 준다길래 양산에 간 죄밖에 없습니다."

영동경찰서 사찰과 형사가 어르고 달래고 하기를 며칠째. 하지만 전우달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만 나왔다. 몽둥이찜질과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도 허사였다. 이제는 형사가 지쳤다. 아무리 해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자 "에잇, 꼬리 없는 소 같은 놈이구만. 나가!"라며 석방시켰다. 과묵하고 옹고집 같은 전우달을 '꼬리 없는 소'라고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전우달은 몸져 누웠다. 전정임(1931년생)은 작은오빠 전우달이 누워있는 방에 찬물과 물수건을 가져갔다가 깜짝 놀랐다. 우달이 가위를 들고 상처 난 피부를 잘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피부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피부가 일어난 상태였다. 전우달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생살을 가위로 잘라냈다. 그런 오빠의 모습에 전정임은 속울음을 했다.

그녀는 작은오빠가 논에 농사일 하러 가는 사람처럼 맥고 모자를 쓰고 중의적삼 입고 삽을 든 날엔 항상 불안했다. 오빠가 좌익 패거리 심부름을 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빠 어디 가?" "참견은... 너, 어머니랑 형한테 이르면 혼날 줄 알아!" 하지만 전정임은 어머니한테 바로 고자질했다. 어머니가 전우달을 혼내키면 답변은 늘 같았다. "심부름을 하면 용돈을 준다고 해서 했어요." 육촌 형이 하는 일에 심정적으로 동조했던 전우달의 변명이었다.

빨치산 토벌대의 패악질

"여성들은 밤에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말은 삽시간에 영동군 학산면 아암리에 퍼졌다. 아암리와 이웃한 양강면 마포리에 주둔한 빨치산 토벌대의 패악질은 이렇게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학산면 여의산과 백하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특공대가 만들어졌다. 아암리 주민들은 이들이 강원도에서 온 군인들로 알았지만, 실제는 영동경찰로 추정된다. 이 특공대는 마포리에 주둔하며 무전취식과 성폭행을 일삼았다.

특공대는 아암리에도 출몰했다. 1949년 겨울 어느 날 새벽, 고함에 방문을 연 전정임은 깜짝 놀랐다. 말로만 떠돌던 특공대들이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겁이 난 그녀는 방문을 잽싸게 닫았다. 아암리 주민에 따르면 특공대원들은 가죽나무를 보고 "이놈의 나무는 왜 이렇게 못 생겼냐"며 군홧발로 가죽나무를 찼다고 한다.

충북 영동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와 남로당, 그리고 농민회 활동이 충북에서 가장 왕성했다. 영동읍을 제외한 영동군 전체가 산악지대여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남로당 영동군당은 야산대(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이전 영동의 빨치산 활동이 민주지산과 삼도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1948년 이후에는 영동읍 심원리, 학산면 아암리·박계리·도덕리 등지으로 옮겨갔다.

남로당 영동군당은 1949년 봄에 인민유격대를 결성해 그해 12월까지 활동했다. 그들은 여의산과 백하산에 2개의 아지트를 만들고 활동했는데, 활동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은 모두 주민들로부터 제공받았다. 하지만 아암리 주민들의 이러한 행위는 훗날 많은 대가를 치렀다. 1949년 가을과 겨울 경찰의 토벌로 빨치산은 싹쓸이됐다. 빨치산에 협조했던 이들 중 일부는 청주형무소나 대전형무소에 갇혔다. 일부는 1950년 초 국민보도연맹에 대거 가입했다.

학살 현장에서 아기를 낳은 고장수는 1949년 9월 아암리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녀는 아암리 전상하의 후처로, 생계를 위해 마을에서 주점 겸 식당을 운영했다. 그런데 남로당원 몇몇이 고장수의 식당에서 밥을 먹은 일 때문에 후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저세상으로 가게 됐다.

고장수처럼 6.25 때 학산면 아암리에서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하거나 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은 32명이나 된다. 당시 보도연맹원이면서 목숨을 건진 이는 박희윤(92세, 전 영동군의회 의장)을 포함한 3명에 불과했다. 1차로 연행된 전정임의 작은오빠 전우달은 상촌면 고자리 숯구덩이에서 죽음을 맞았고, 2차로 연행된 큰오빠 전우준(1922년생)과 고장수 등 아암리 보도연맹원들은 영동읍 어서실에서 학살됐다.

"나락 모가지 센 게 죄냐"
 
작은오빠 전우달이 학살된 충북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 숯가마 앞 전정임.
 작은오빠 전우달이 학살된 충북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 숯가마 앞 전정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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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지서 문을 연 전정임(91세, 영동군 학산면 아암리)은 깜짝 놀랐다. 인공 시절 부역한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모여있었다. 영동경찰서에서 출장 나온 형사는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라며 으르딱딱 거렸다.

"나락(벼) 모가지(낟알) 센 게 죄요?" 전정임은 도리어 경찰들에게 핏대를 올렸다. 자신의 큰아버지이자 고장수의 남편인 전상하가 마을에서 인민위원장 일을 보면서 "야야 남들 다 가는 데로 가야 산다. 인공 세상에서 인민군 말 들어야지 산다"라며 북한군의 심부름할 것을 권했다. 수차례 큰아버지의 청을 거부한 그녀는 할 수 없이 학산면 황산리 필력마을로 일을 나갔다. 전정임이 한 일이란 벼 낟알을 세는 것이 고작이엇다. 

"전쟁이 나자마자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후퇴)간 주제에, 이제 와서 인민군 심부름 한 것 같고 따지냐!"며 성토했다. 자신의 오빠 둘, 큰어머니(고장수), 육촌 오빠(전우평)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풀이기도 했다. 경찰들이 혀를 내두르며 그녀를 풀어주었다.

빨치산에 협조한 학산면 아암리 주민들은 사법부의 처벌을 받았다. 혐의가 적은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경찰은 6.25가 터지자 이들 모두를 학살했다. 더군다나 임산부를 학살하고 그 와중에 태어난 아기까지 죽음을 방치한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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