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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를 생각하면, 저고리를 입은 맨발의 소녀가 떠오른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가혹한 성 착취를 당한 무구한 조선의 소녀들. 내가 사는 지역에 세워진 소녀상을 마주하고 문득 35만 명~4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위안부가 여일하게 이 소녀상의 모습이었을까, 자문해 본 적이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란 어쩌면, 맨발의 소녀 외 다른 모습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떠올리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무구한 피해자로 표상되는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에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식민지 여성들뿐 아니라 자국의 여성들도 위안부로 동원했던 일제는, 위안소로 보내진 상당수가 매춘녀로 불리던 '성착취 선경험'이 있는 여자들이었기에, 이들을 피해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보호받을 피해자와 보호받지 못할 피해자 혹은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라는 이분은 일본에서 더 첨예했다. 자발적 성매매 여성이라 여겨지는 이들 역시 전쟁터로 끌려가 혹독한 성착취의 피해를 입었지만, 이들은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위안부'는 여자다>(캐롤라인 노마 지음)에서 노마 교수는 일본군 성노예제의 원형이 바로 민간 성착취 산업임을 적시한다. 그는 민간 성착취 업자가 군과 공모하여 '성착취 선경험' 여자들을 위안소로 끊임없이 공급한 역사를 밝히고, 민간 성착취 산업의 기원을 좇아 다이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에 일본 남자를 물들여 온 기획된 성착취 역사, 그리고 이런 만연한 강간/성착취 문화가 일본 남자들에게 성착취를 권리로 인식하게 만들었던 과정, 그리고 마침내 민간 업자의 성착취 산업이 일본군 성노예제를 배태시켰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 '음침한 골짜기'에 "당해도 싼" 여자로 혐오되어 희생된 가난한 여자들이 묻혀 있음을 낱낱이 증거한다.

노마 교수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규정하는 '자발'과 '선택'이라는 주장을 광범한 자료를 통해 허위임을 입증하면서, '사회적 틀 안의 위력'을 이해해야만 위안부가 구성된 과정의 폭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성착취 선경험'이 있는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가 타 피해자와 비교할 때 인생에서 더 긴 기간 동안 성폭력과 트라우마에 직면했다는 사실, 아동 때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갔으므로 "당해도 싼" 여자들이 결코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성착취/성폭력을 "당해도 싼" 여자는 없다.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확증편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미 위안소의 싹을 발아시키고 있던 전쟁 전 평시 일본 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성적 자유를 구가한 것으로 오해되는 다이쇼 시대(1912~1926)는 오히려 "일본 남자가 성적 권리와 자격 의식을 지독히 키워나간 시기"로, "여자를 성착취할 권리가 평등화 되었"던 끔찍한 시기다. 다이쇼 시대에는 "엄청난 수의 남자들과 어마어마한 돈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미 '공창'이 자리 잡고 있던 성착취 산업은 도시로 유입된 남자들의 성적 권리를 충족시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던 셈이다.

탄탄히 구축된 인신매매 공급망은 급격히 늘어난 남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성착취 산업의 근간이 되었다. 딸을 계약 노예로 넘기고 그 가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인신매매는 가난한 농촌에 만연했으며, 아이가 어릴 경우 입적을 시키는 꼼수로 평생 노예화했다.

1920년대 후반 370가구가 사는 한 산골 마을에 200명의 여자아이와 청소년들이 소개업자에게 팔린 상태였다는 증언은 인신매매가 얼마나 극악했는지를 증명하는데, 이렇게 팔린 어린 여자아이들은 규제를 덜 받는 성 착취 업소인 카페 여급으로 대다수 유입되었다. '카페' 뿐 아니라 '게이샤' 업소, '요리점', '공창' 등으로 상당한 소녀들이 인신매매로 공급되었고, 1925년 23만 명에 이르는 여자들이 억류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다양한 성착취 산업에 분포된 여자들은 도시로 운집한 남자들의 성착취 수요를 충족시키도록 준비되었고,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한 성착취 산업이 다이쇼 시대를 떠받치고 있었다. 일본 남자들은 평등화된 매매춘에 깊이 물들게 되었고 이후, 전쟁의 광풍에 휩싸인 일본이 이렇게 구축한 성착취 문화를 위안소로 이전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결과였다.

일본군의 요구로 설계된 위안소가 민간 성착취 업자인 포주에 의해 관리되었으니, 군 위안소가 민간 성착취 업소와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쌍생아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은 필연이다. 위안소의 내부 설계나 배치도, 운영 방식, 그날의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위안부에게 징벌을 가하는 규칙 등 민간 업소를 그대로 전쟁터로 옮겨 놓았다.

노마 교수는 일본군의 초역사적이고 범세계적인 성착취가 가능했던 배경의 하나로 이미 다이쇼 시대부터 만연했던 민간 성착취 문화와 이를 추동하고 퍼뜨린 일본 지배 계층을 지목한다. 이들은 군사작전과 동시에 위안소를 지어 '일본군의 성착취 평등화'에 앞장섰다. 성착취 제도로 남자 전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지배 계층은 군대 전반에 성착취 권리를 제공해 '공유된 여자'로 성적 목적을 충족함으로써 공유자끼리의 통일감과 유대감을 유지시키는 동시에 지배 계층의 가부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성착취를 통해 전시 군인들을 통제했던 지배 계층은 전쟁이 끝난 후 "성적 뇌물을 받은 남자 시민들"을 '평시' 사회에서 순순히 착취당하고 통제당할 준비를 시킨 셈이다. 전후 사회를 재건하며 이들이 산업 전사로 거듭나 과로 사회를 견인할 수 있었던 근간에 성착취라는 공동의 알리바이가 있었던 것이다.

전후 일본은 '성착취 선경험'이 있는 여자들의 경험을 자발과 선택이라 낙인찍어 철저히 지움으로써 성착취를 권리로 인식하는 남성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로 인한 폐해는 "성인 남자는 물론이고 남자 청소년이 자행한 심각하고 조직적이고 다변화된 성범죄 사건이 일상적으로 보도"되는 현실로 이어지게 했다.

노마 교수가 주장하듯 한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평시 성문화는 극단적인 전쟁의 군 성노예제를 견인해내기에 매우 위험하다. 전쟁터로 수많은 여자들을 끌고 다니며 위안소를 운용했던 일본은 지금도 민간업자가 피해자를 잘못 골라 위안소로 강제로 끌고 온 것이 문제였지, '성착취 선경험'이 있는 여자들이 위안부가 된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고 있다.

이는 '성착취 선경험자'는 성착취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여성 혐오가 여전히 일본의 지배적 정서임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일본군 성노예제가 끼친 가장 큰 폐해는 조선은 물론이고 주둔했던 나라들에 무차별적으로 성착취 문화를 이식해, 이를 통해 범세계적으로 수많은 성착취 피해자들을 양산해내 고통에 처하게 만든 데에 있다. 초국적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초국적 범죄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조선의 위안부 피해자 중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성착취 선경험자'가 상당수 있을 수밖에 없는 진실을 전제하고, 이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의 발원을 추적하는 일은 그 피해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착취라는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에 있어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무의미함을 밝히기 위해서다.

일제에 합병되기 전부터 조선은 이미 일본에 만연한 성착취 문화를 이식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군을 주둔시켰다. 일제가 군을 주둔시킨다는 것은 위안부가 따라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미 다이쇼 시대부터 공창이라는 성착취 문화를 누려온 일본 남자에게 군의 성착취는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소개업자가 성매매 여성들을 공급하는 탄탄한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던 민간 성착취 업자는 1894년 이후 인신매매된 여자들을 한반도로 꾸준히 공급하기 시작했다. 1908년 조선에서 성착취당하는 일본 여자는 2839명에 이르렀고, 일본 거류지에만 적용되던 단속규칙이 1919년 합법화되어 한반도 전체에 반포되었다. 이는 조선에 공창이라는 성착취 문화가 이미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늘어나는 성착취 수요를 일본에서 공수되는 여자들로만 유지할 수 없었다. 1929년 성착취되는 한국 여자가 일본 여자보다 많았다는 기록은 상당한 한국 여자가 이미 성착취 산업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일제시대 신문이나 소설 등에 종종 카페나 카페 여급으로 저급하게 묘사되는 대부분의 여자는, 실제로 1930년대 우후죽순 등장한 카페로 인신매매되어 공급된 조선 여자들로 특히 미성년 여자들이었다. 1939년 조선에서 성착취되는 여자는 1만 8000명이었다. 당시 인구 수를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이미 식민지 조선에 깊이 뿌리내린 성착취 업소는 소개업자와 공급망을 단단히 구축하며 가난한 여자들을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대거 유입된 한국 여자들은 일본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인신매매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 본토의 다양한 성착취 업소로 인신매매되고 일부는 탄광의 성착취 업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영화 <군함도>에서 성착취 당하는 여자로 등장한 오말년(이정현 분)의 존재가 허구가 아닐 수 있는 근거다.

식민지 조선에 독처럼 퍼진 성착취 산업에 무수히 유입된 여자들은 사할린, 대만, 만주, 다롄, 칭다오 등 일본 남자가 있는 곳은 어디든 인신매매되었고, 군의 이동에 따라 당연히 부설되는 기관처럼 세워진 위안소로 공급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조선 여자가 가장 많았던 이유가 설명되는 것이다. 강제로 끌려가 고초를 당한 분들뿐 아니라, 성착취 업소에서 인신매매되어 끌려간 여자들도 상당했다.

사실이 이러한데 피해자를 자발이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착취 선경험자 여성들이 인신매매되어 성착취 업소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이들을 자발이라는 명목으로 피해자의 자리에서 밀어낼 수는 없다. 당시 곤궁한 산골 마을을 돌며 이들을 모집해 성착취 업소에 넘긴 소개업자는 두둑한 돈을 챙겨 배를 불렸고, 성착취 업소의 포주는 헐값에 사들인 여자들로 막대한 이득을 얻어 전도유망한 사업가로 발판을 다질 수 있었고, 헐값으로 여자의 몸을 사들인 남자들은 마음껏 성착취를 할 수 있었다.

이 구조 속 남자들 모두 여자들이 당한 성착취 범죄에 공범이다. 단죄해야 할 유죄는 성착취를 문화로 기능하게 한 남성 강간 동맹이지 피해자들이 아니다. 노마 교수가 진짜와 가짜 피해자를 분할하며 형성된 일본군 위안부 정의 운동의 주도적 담론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하는 이유다.

일본의 역사적, 젠더적 성찰을 결여한 '성착취 선경험자'들에게 가해지는 가짜 피해자라는 혐오가 단지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의 성착취 역사에도 함의하는 바가 크다. '성착취 선경험자'들에 대한 혐오 프레임은 미군 '위안부'나 존재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한국군 '위안부'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에게서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전시 성폭력 피해자'라 부를 때 나는 혼란스럽다. 이들이 과연 단지 전쟁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게 된 걸까?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의 노예와도 같은 삶은 어째서 해방되지 못했던 걸까? 일본군 '위안부'의 상당수가 해방이 된 후 다시 미군 '위안부'가 된 경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미군 '위안부'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포주가 된 국가의 묵인과 방조 아래 본격적으로 생성되고 착취된 사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걸까? '주둔국 여자들의 강간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는 어이없는 점령군의 명분에서, 강간으로부터 보호받을 여자는 누구이며, 강간을 당해도 되는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이 다가온다. 선명히 각인된 피해자들의 이름을 낮은 소리로 불러본다. 모두 고결한 피해자들로 상정되지만, 최초로 '위안부' 사실을 커밍아웃하고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본 오키나와의 배봉기나 '위안부'였노라 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숱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다. "이전에 유곽 등으로 팔려가 창기 생활을 하다가 위안소로 다시 팔려간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더해, 그간 우리 사회는 "위안부는 공창이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보낸 것이다."(박혜경) 흠결 없는 소녀라 명명된 피해자들의 존재와 증언은 일면, 흠결 있다고 여겨지는 피해자를 숨게 했을 지도 모른다. '위안부' 정의 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까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소녀로만 상상되고 전유 되는지 돌아보고 싶은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진짜와 가짜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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