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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카메라 앞에 서는 아나운서다. 뉴스를 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카메라는 나를 비추고, 내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화면 밖으로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나를 쳐다본다. 1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방송할 때 가장 설레고 기쁘다.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일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주 생각한다. '과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일에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 그만큼의 보상과 안정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불안이 커지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ON AIR' 빨간불이 들어오고 꺼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PD, 기사를 쓰는 기자, 원고를 쓰는 작가, 카메라를 잡는 감독, 조명과 화면을 담당하는 기술감독, CG를 만드는 AD, 마이크를 채워주는 AD,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는 분장실 선생님 등등.

이 중 누군가는 정규직, 누군가는 계약직, 누군가는 한시직과 임시직, 누군가는 프리랜서 그리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생이다. 하나의 방송이 송출되기까지 누구 하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데, 그 안에서 비정규직들은 너무나 쉽게 없어지곤 한다. 방송은 편성이 있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면에 나가야 하고, 개편이 있어 너무나 쉽게 물건 버리듯 사람도 쓰고 버린다. 방송은 사람이 만드는데, 이상하게 방송국 안에서는 사람보다 방송이 먼저다.

아침에 출근한 작가가 방송을 마치고 저녁에 퇴근할 때 별안간 해고 통보를 받는 일.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너무나 쉽게 진행자가 바뀌는 일. 임신한 여자 아나운서가 출산 후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 일. 쉼 없는 촬영 일정과 밤샘 편집으로 PD가 병을 얻고 쓰러져 가는 일. 모두 방송국 내부의 '프리랜서'들이 당한 일이다.

시사, 뉴스, 음악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곳에서 방송작가로 일해왔던 저자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내내 쓰지 못했고, 쓸 수 없었단 단 하나의 오프닝이 있었다. 바로 본인이 일하는 방송국에 대한 이런 이야기였다.

수많은 '원래'를 지우기 위한 시작
 
이은혜 시민기자가 펴낸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관련 이미지.
 이은혜 시민기자가 펴낸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관련 이미지.
ⓒ 꿈꾸는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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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노동문제와 사회 여러 곳의 부조리, 개인의 억울한 사연까지 취재하고 보도하는 방송국에서 정작 그들 내부의 문제들은 쉬쉬하고, 묵인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현실. 그 중심에 있었던 작가는 진짜 쓰고 싶었던 단 하나의 오프닝을 쓰지 못해 일을 그만둔 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은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어떤 이야기는 생각도 감정도 마음도 넘쳐 한 페이지에서 한 권의 분량이 되기도 한다.
 
방송에 성역은 없다. 방송국 카메라와 마이크를 잡은 이들은 대통령도 교황도 만난다. 머나먼 타국의 대규모 시위나 내전 지역도 방문한다. 이들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하지만 가지 않는 곳은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꺼 버리는 단 한 곳. 바로 '방송국'이다. 방송국 안에서 벌어진 일을 방송은 고발하지 않는다. - 222p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은 나오지 않았어야 맞다고. 그러기엔 방송가의 부조리는 차고 넘쳤다. 나 역시나 방송국에서 일하며 자주 보았고, 당했고, 한탄했다.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와 노동 착취와 관련된 뉴스를 보도할 때마다 방송국 내부의 비정규직들을 자주 말하곤 했다. 우리 회사부터 취재해야 할 것 같다고.

하지만 작가는 책을 통해 단지 본인의 부당해고와 적은 임금, 불안한 처우가 부당하다고 외치는 게 아니다. 다른 프리랜서 작가, 피디, 리포터, 아나운서 등 방송가의 모든 '사람'에게 시선을 넓혔다. 연대했고, 기록했다. 그래서 이 책은 꼭 나왔어야 할 책이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은 기득권의 언어다. 논리와 혁명에 대응하는 가진 자의 마스터키다. '원래'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여성들은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고, 흑인과 백인이 따로 앉아야 했을지도 모른다....이제 방송가 노동자들에게 호의가 아닌 당연한 권리를 찾아줄 때다. 과정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시작은 어렵지 않다. '원래'를 뒤집으면 된다. 프리랜서는 원래 다 그렇다는 문장의 '원래'를, 방송가는 원래 이런 것 몰랐냐는 문장의 '원래'를 지우고 다른 해법으로 대체해 나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방송이라는 토양에 뿌리 내린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수많은 '원래'를 하나하나 지워나가자고. - 175p
 
비록 나와 하는 일은 다르지만, 방송국 안의 같은 '프리랜서'로서 겪었던 경험과 느꼈던 생각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기록해 주니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불편하고 힘든 이야기들은 기억하는 것조차 괴로워 자주 사라지고 잊히기 마련인데, 그 쉽지 않은 일을 애써 해낸 작가의 용기에 응원을 보낸다. 이런 기록은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하니까. 나는 이런 흔적이 좀 더 나은 방송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방송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일을 하다 병들거나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꿈꾸는 일을 한다는 긍지만으로 착취가 정당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비상식이 업계의 불문율로 통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일하는 모두가 노동자로 존중받기를 바란다. 시청률도, 한류도, 해외 판권도, 베스트셀러도 이 뒤에 왔으면 좋겠다. - 11p
 
이 문장이 아마도 작가가 이 책을 쓴 비장하면서도 다정한 마음일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프리랜서들이, 노동자들이,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 방송가의 불공정과 비정함에 대하여

이은혜 (지은이), 꿈꾸는인생(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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