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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의 모습. 최제우가 득도를 한 곳으로, 사진의 건물은 물론 당시의 것이 아니라 복원한 것이다.
 용담정의 모습. 최제우가 득도를 한 곳으로, 사진의 건물은 물론 당시의 것이 아니라 복원한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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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주자학적 전통으로 굳게 닫힌 전근대의 강고한 철벽에서 인권ㆍ평등ㆍ자존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삶의 주체로서 민족정신을 일깨워서 근대의 문을 열었다. 봉건적 전근대의 철문을 닫고 근대의 광장을 연 것이다. 

동학은 창도 초기가 도인들의 각성기라면, 중기는 교조신원운동과 교세확장, 후기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전개되었다. 동학 1세교조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처형한 정부는 내적인 개혁요구와 세계사적인 변혁의 사조에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있다가 강제 개항을 맞게 되었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서 동학은 제국주의의 침투에 의한 반식민지화와 국내 봉건적 관료층의 수탈로 신음하는 피압박 민중의 해방운동과 반봉건ㆍ반외세 투쟁을 위한 혁명이념으로 나타났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미곡 징수와 만석보의 2중적인 수세징수가 농민의 원성을 사게 되자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 등 동학교도들이 봉기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세계혁명사, 예컨대 영국의 청교도혁명, 독일의 종교개혁,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중국의 신해혁명,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은 모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변혁운동이었다. 우리의 경우 동학혁명을 이들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자주적인 민중혁명에 속한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 동학의 창시자와 계승자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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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이 있다면 동학을 창도한 교조와 2세 교조, 3세 교조가 잇따라 정치권력과 외세 침략세력에 의해 참사를 당했다는 점이다. 세계 유수의 종교 창도자들도 대부분 수난을 겪지만, 2~3대 교조까지 변을 당한 경우는 동학이 유일하다. 수운은 고종에게, 해월은 고종과 일제에 의해 참수당하고, 3세 교조 의암은 3ㆍ1혁명 주도와 관련  투옥되었다가 숨지기 직전에 석방됐으나 사실상 옥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 동학도와 참여농민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도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다. 

우리 민족 종교로서의 동학도(東學道)는 창도자 수운 최제우의 동학 대각(大覺)과 그 초기 포덕 관계에서 이미 동학 교문의 접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도통을 이은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동학 교리 형성과 교문 형성ㆍ확대에 대한 초인적인 역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으로의 발전과 근대 민족사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동학의 공헌은 있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의 모습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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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운은 창도로써 동학의 씨앗을 심었다. 그 고귀한 씨앗은 최해월의 '은도 시대'에서 발아와 육성을 거쳐 숙성되어, 조선 왕조의 몰락기에 왕조사의 뒤를 이을 근대적 민족 주체 세력이 됨으로써 근대의 민족 융성기를 마련하는 데 정신사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주석 4)

한국근대 민중운동의 기원은 해월을 원류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문을 사회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 같다. 해월은 수운 교조의 순도 이후 1878년 개접제(開接制), 1884년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하여 신도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각종 집회를 만들었다. 대단한 전략가이기도 하다. 

이런 조직을 기반삼아 1차로 1892년 11월 전주 삼례역에서 충청ㆍ전라도 관찰사에게 교조신원을 요구하고, 2차로 1893년 2월 동학간부 40여 명이 광화문에서 임금에게 직접 신원을 호소하고, 3차로 같은 해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명의 교도가 집결하여 대규모 교조신원의 시위를 벌였다. 이 같은 연속적인 집회는 유사 이래 없었던 일이다.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 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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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신원운동은 좁은 의미에서는 종교내부의 행사같지만, 봉건군주체제에서 다수의 피지배 민중이 집결하여 대정부(국왕) 요구를 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일종의 모반행위였다. 해월은 '공개적 모반'을 시도하고, 이것은 민중들에게 근대적 시민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감옥으로 몰려가면서 앙시앙 레짐이 무너지기 시작했듯이, 동학의 신원운동은 동학혁명→만민공동회→3ㆍ1혁명→4ㆍ19혁명ㆍ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되었다. 

그 중심에 동학이 있었고, 해월의 리더십과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이 촛불혁명의 발원지가 되고, 이것은 남북화해협력과 평화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주석
4> 신일철, 「해월 최시형의 시(侍)와 경(敬)의 철학」, 부산예술문화대학 동학연구소 엮음, 『해월 최시형의 동학사상』, 93쪽, 예문서원, 199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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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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