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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피체지에 세워진 비석
▲ 최시형 피체지에 세워진 비석 최시형 피체지에 세워진 비석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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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압송된 최시형은 광화문 경무청에 수감되었다가 서소문형무소로 옮겨졌다. 목에 무거운 큰 칼을 쓴 채 종로 공평동의 고등재판소에서 10차례 재판을 받고 7월 18일(양력) 교수형에 처한다는 평결을 받았다. 죄목은 최제우와 같은 혹세무민ㆍ좌도난정하는 사교(邪敎)를 폈다는 것이다.

최시형에 대한 재판은 서울 고등재판소의 검사시보 윤성설의 입회하에 1898년 2월 1일 (광무 2년) 진행되었다. 재판관은 다음과 같다.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유인

판사
이인우

판사
김기룡

예비판사
조병갑

예비판사
권재운

주사
김낙헌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이 있다. 예비판사 조병갑이다. 동학혁명 발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의 상징 고부군수 조병갑이 처벌되기는 커녕 고등재판소 예비판사가 되어 동학혁명의 최고 지도자를 심판하게 된 것이다. '예비판사'는 유고시에 대타로 나서게 하는 자리가 아닌 권력층에서 파견한 일종의 감시병이었다.

조병갑의 최시형 재판은 해방 후 친일ㆍ분단ㆍ외세를 등에 업은 이승만세력이 1급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를 암살하고, 일본군장교 출신 권력자들이 광복군장교 출신의 민주화지도자 장준하를 암살한 사건처럼, 민족모순과 역사반역의 상징적인 비극에 속한다고 하겠다. 
 
최시형 선생
▲ 순국 직전의 최시형 선생 모습 최시형 선생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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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재판소의 '판결문'을 살펴보자.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1866년)에 간성에 사는 필묵 상인인 박춘만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동학을 전수받아 선도(善道)로 병을 치료하고 주문(呪文)으로 신(神)을 내리게 한다고 하며 여러 군과 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 강신문(降神文) 및 동학원문(東學原文)의 제1편 포덕문ㆍ제2편 동학론ㆍ제3편 수덕문ㆍ제4편 불연기연문과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적으로 인민을 선동하고 무리를 규합하였다.

또한 복주인(伏誅人) 최제우의 "만년지상화천타(萬年枝上花千朶)"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一鑑)"라는 싯구를 사모하고, 법형법제(法兄法弟)의 실심과 경신을 따라 법헌(法軒)의 호를 부르며 해월의 인장을 새겨 교장ㆍ교수ㆍ집강ㆍ도헌ㆍ대정ㆍ중정 등의 두목(頭目)을 각 지방에 임명하였다. 또한 포(包)와 회소(會所)를 설치하여 무리를 모았는데,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법에 따라 죽은 최제우를 신원한다고 하여 지난 계사년(1893년)에 신도 몇 천명으로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를 올렸다가 바로 해산을 하였고, 보은의 장내에 많은 무리를 모았을 때에 순무사의 선유 때문에 각자 해산하였다. 

갑오년(1894년) 봄에 이르러 피고의 도당인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고부지방에서 같은 패를 불러모아 기세를 타고 일어나서 관리를 해치며 성과 진을 함락시켜 양호(兩湖)의 땅이 썩어 문드러져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피고가 이때에 호응하여 지휘한게 없다고 하지만 난리의 단계와 재앙의 근원을 살펴보면 피고가 주문과 부적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데서 연유하였다. (주석 1)

해월 최시형은 옥중에서 심한 설사 그리고 목에 씌운 무거운 칼로 반주검 상태에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로 동학주문을 암송하는 등 조금도 굽히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생사를 뛰어넘어 초탈한 것이다. 5월 12일 법부대신 겸 평리원재판장 조병직과 수반검사 윤성선, 법부협판 겸 수반판사 주석면이 다시 법정을 열고 여러 차례 심문하였다. 그리고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로서 사형을 최종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72세인 1898년 6월 2일(양력 7월 20일) 오후 2시 경성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處敎罪人 東學魁首 崔時亨)〉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교수대에 태연히 올랐다.

검사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나 죽은 뒤 10년 이내에 동학의 주문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 (주석 2)
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 서울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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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교조에 이어 똑같은 죄목으로 2세 교조가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하였다. 세계 종교사에 일찍이 없는 일이다. 

신사가 갇혀 있을 때에 북접 대도주와 박인호, 김연국 등은 숨어 있으면서 바깥의 일을 주선하고 오직 이종훈은 교졸 김준식과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어 비밀리에 신사의 의복과 음식을 바치다가 신사의 병으로 인하여 삼탕(蔘湯)을 바치더니 신사가 형을 받으신 후 김준식과 꾀하여 밤을 틈타 비를 무릅쓰고 그 시체를 광희문(光熙門) 밖에서 거두어 여주 이상하(李相夏) 집에 이르니 이때 의암ㆍ구암이 여기서 기다리다가 같이 이상하의 산에 장사지내다. (주석 3)
해월 최시형 추모비
▲ 해월 최시형 추모비 해월 최시형 추모비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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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이 나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대혁명가요, 종교가요, 성자인 그의 넋을 받드는 장엄한 최후였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찾을 때는 그가 남긴 시 한 수를 길이 상기할 것이다.

젊어서 무덤에 오니 청춘이 곡하고 (少來墳典靑春哭)
늙어서 경륜이 가니 백마가 우는구나.(老去經綸白馬嘶) 


주석
1> 「동학관련판결 선고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2)』, 234~235쪽.
2> 『천도교서』, 315쪽.
3> 최동희, 앞의 책, 39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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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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