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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이 민족시인 이상화에게 보낸 엽서.
 1920년대 초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이 민족시인 이상화에게 보낸 엽서.
ⓒ 권오설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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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친구들은 모두 평안합니까. 간절히 보고 싶습니다.

6.10만세운동의 기획자였던 독립운동가 권오설이 민족시인 이상화에게 보낸 엽서 내용 중 일부다. 

1920년대 초에 보내진 것으로 추정되는 권오설의 엽서에는 "너무 오래 적조했다(서로 연락이 끊겨 소식이 막혔다). 아우는 산골의 무지렁이 노릇으로 밥만 축냈다"면서 "27, 8일경 대구에 구경 나갈 듯하니 그때 많은 사랑 받기만을 원한다(교류를 나누자)"라고 적혔다. 

시인 이상화를 향한 독립운동가 권오설의 지극한 마음이 느껴지는 글로, 박찬승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부회장)는 지난 4월 권오설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이 엽서를 해독했다. 그리고 이 결과를 2일 새벽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2일 <오마이뉴스>에 "친구 사이일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시인 이상화와 사회운동가 권오설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음이 이 엽서 한 통을 통해 확인됐다"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상화가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발표한 것은 <개벽>의 1926년 6월호였다. 그해 4월 25일 순종이 승하하고, 5월 들어 그의 벗 권오설이 6.10만세 운동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바로 그때, 이상화는 이 시를 썼던 거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박 교수는 "이상화는 1901년생으로 권오설보다 네 살 아래지만, 권오설은 엽서에서 '이상화 형'이라고 칭했다. 두 사람은 아마도 같은 시기 중앙학교 다닐 때 서로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덧붙였다.

서울 중앙학교에서 맺은 인연, 고향 안동과 대구에서도 이어져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수형기록카드.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수형기록카드.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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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의 말대로 권오설과 이상화, 두 사람은 모두 1910년대 중후반 서울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며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 경북 안동 가일마일에서 태어난 권오설은 대구고보를 다니다 1916년 친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퇴학 당했다. 이후 서울에 올라와 중앙학교를 다녔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중도에 그만둔 뒤 광주로 내려가 전남도청에서 일했다. 1919년 3월 3.1운동이 발발하자 참여했고 이 일로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말 권오설은 다시 고향 안동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하면서 청년운동, 농민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구에 사는 이상화에게 엽서를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권오설은 엽서에 "아우는 산골의 무지렁이 노릇으로 밥만 축냈다"라고 겸양 섞인 말로 자신의 상황을 에둘러 나타냈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화는 1915년 중앙학교에 입학해 1918년 봄 중퇴할 때까지 3년여를 서울에서 보냈다. 권오설이 서울에서 유학하던 시절과 겹치는 지점이다. 이상화 역시 1919년이 되자 고향 대구에서 친구들과 함께 3.1운동을 모의했다 적발돼 은신생활을 했다. 1919년 말 서온순과 결혼 후 1922년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대구에서 생활하며 시작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나눈 서신 이외에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철관 속에 잠들었던 권오설, 불령선인 이상화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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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권오설은 1923년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해 농민운동에 진력한다. 풍산소작인회는 회원이 5천 명에 달하는 조직으로 성장하고, 권오설은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직해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한다. 

1925년 2월 권오설은 김단야,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고 같은해 4월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창설해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며 조직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순종 승하 직후인 4월 말경부터 상해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인사들과 함께 6.10만세운동을 계획해 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해 운영한다. 

그러나 거사 사흘 전인 6월 7일 계획이 사전 발각되면서 체포됐고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중인 1930년 옥중에서 순국한다. 일제는 1930년 권오설이 33세로 죽자 고문 흔적을 감추기 위해 시신이 든 목관을 함석으로 밀봉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년 뒤인 2008년 4월 후손들은 부부합장을 위해 무덤을 열었고, 빨갛게 녹이 슨 철관 속에서 함몰된 권오설의 두개골이 발견됐다.
 
민족시인 이상화
 민족시인 이상화
ⓒ 이상화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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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이상화는 1923년 관동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일제가 저항하는 조선인을 적대하거나 폄하하는 의미로 사용한 단어)'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는다. 관동대지진의 수난 속에 어렵게 귀국한 뒤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이끌었던 '카프(KAPF)'를 발기해 활동했다. 하지만 1927년 이상화는 의열단원 이종암 의거 사건에 연루돼 대구경찰서에 수감된다. 

이상화는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과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 협의 활동을 모의했다. 1937년 귀국 후 대구경찰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는다. 이후엔 번역과 연구 작업에 몰두한다. 1943년 초 쓰러진 뒤 위암과 폐결핵, 장결핵 등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권오설과 민족시인 이상화의 묘는 각각 고향 안동과 대구에 마련됐다. 아래는 권오설이 이상화에게 보낸 엽서 원문과 박찬승 교수가 권오설선생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해독한 내용이다.
 
너무 오래 막히엇나이다. 요사이 늦은 봄 날씨의 온갖 새롭운 物과 景, 形形色色으로 제각각 저의 자랑을 들어내는 듯. 참말 故人의 서로 生覺하는 懷抱야 말로 헐 수 없나이다. 요사이 모실 貴○○ 健康하시와 많은 滋味보시며 여러 親舊들 面面 平通함닛가. ○切히 알고 접어요. 아우는 뫼골 무지렁이 노릇으로 밥만 축냅니다. 二十七八日頃 貴地 求景나갈 듯, 그때 많은 사랑 받기만 願하옵고 긏이나이다.

(너무 오래 적조했습니다. 요사이  늦은 봄 날씨의 온갖 새로운 만물과 경치가 형형색색으로 제각각 자기 자랑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참말 옛 사람처럼 서로 생각하는 회포는 말로 할 수 없나이다. 요사이 모시고 계신 OO께서는 건강하시어 많은 재미 보시며, 여러 친구들은 모두 평안합니까. 간절히 보고 싶습니다. 아우는 산골의 무지렁이 노릇으로 밥만 축냅니다. 27,8일경 대구에 구경 나갈 듯합니다. 그때 많은 사랑 받기만을 원하옵고 이만 그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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