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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광복절'을 맞이하는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되면 과거사와 관련한 담론들이 뜨겁게 달아오르곤 한다. 주권을 강탈당했던 식민통치기의 굴욕과 해방의 감격, 그 이후의 굴곡진 흐름들. 옛 근현대사의 기억이 미디어를 통해 되새김질 되다 보면, 어느새 대중의 눈은 당시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8월을 맞이하는 일본의 분위기는 어떨까. 8월은 일본 사회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 8월, 일본에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다. 방송사에서는 일제히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추도 행사가 거행된다. 일본 내각이 과거의 전쟁책임과 식민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했던 무라야마 담화(1995년), 고이즈미 담화(2005년), 간 담화(2010년) 역시 모두 8월에 이뤄진 발표였다.

8월은, 일본 역사에 있어 상처이자 전환점이었다. 3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을 희생시킨 전쟁은 파국으로 끝났고, 그 파국 위에서 (타의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건설돼 오늘날의 현대 일본에 이르게 됐다. 그 분기점이었던 8월 15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직면하기 괴로운 물음이 일본 사회에 제기된다.

'그때의 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2020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일에 원폭돔 앞에서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당수가 '핵무기 금지'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
▲ 원자폭탄 희생자들을 추도하며 핵무기 금지를 요구하는 시위(2020년) 2020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일에 원폭돔 앞에서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당수가 "핵무기 금지"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
ⓒ 사민당 히로시마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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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의 집착이 국운을 뒤흔들다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 침공과 진주만 공습을 개시하기 넉 달 전이던 1941년 8월 초에도, 어떤 중대한 물음이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창 전쟁 중이던 일본에 대한 미국의 금수조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4년 째 중국에서 전쟁을 이어오고 있던 제국 일본은, 수십만의 전사자를 내고도 중화민국 정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전쟁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본의 국력으로는 중국 대륙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이 한계점 앞에서 제국 일본은, 나치 독일에게 무릎을 꿇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치하의 동남아 식민지로 눈을 돌렸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는 물자 독점권을 요구하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아예 일본군 부대들을 진주시켰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의 예상보다 격렬하게 침략에 저항하였다.
▲ 상하이를 방어하는 중국군 진지(1937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의 예상보다 격렬하게 침략에 저항하였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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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한 것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던 열강들에 있어 크나큰 위협으로 간주됐다. 이미 중일전쟁으로 중국의 소비시장과 각종 이권들을 위협받고 있던 상황에서, 계속되는 일본의 침략 팽창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에서는 일본으로의 석유 및 철강 수출을 제한하고 국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초강수를 뒀으니, 그것이 바로 1941년 8월의 일이었다.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물자 수급이 순식간에 막혀버려 패닉 상태에 빠진 일본을 향해 미국은 중일전쟁의 종결을 과감하게 요구했다. 금수조치가 풀리지 않는 이상 중일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금수조치를 풀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철군해야 하는 이 딜레마가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도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그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타개책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의 개전이었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대장은 미국의 금수조치 이후 중일전쟁의 종결이 의제로 떠오르자 "중국에서 육군을 철군시키면 완전히 흐트러져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중신들을 위협했다. '육군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발언은 육군에 의한 정변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이미 2.26사건과 같은 군사정변의 선례가 있던 상황에서, 이 같은 위협은 전혀 허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내각의 승인 없이 일선 부대의 자의적 발포로 시작됐던 중일전쟁은 육군 세력의 승승장구를 보장하는 '철밥통'과도 같았다. 그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 이미 상당한 출혈을 감내했던 당시의 시점에서 육군은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에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굴욕적 요구를 내걸었던 미국을 응징해 힘으로 금수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발상이 육군 내에 팽배해졌다. 중일전쟁 계속에 대한 육군의 집착은 나라 전체의 국운을 뒤흔들게 됐다.

해군의 셈법은 다소 복잡했다. 개전 계획이 엉성하며 현실성 없다는 지적도 해군 내에서 많았지만, 정작 해군 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대장은 쇼와 천황에게 개전 찬성의 뜻을 상주했다. 개전에 찬성한 이유에 대해, 나가노 대장은 '해군이 전쟁에 반대하면 육군과 우익이 내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어차피 해야 하는 전쟁이라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시기에 시작해야한다'는 변을 측근에게 남겼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해군은 해군대로 새롭게 시작될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보신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지상전이 중심이 된 기존의 중일전쟁에서 해군이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해군은 정책의 중심에서 육군에 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바다가 주전장이 될 새로운 전쟁은, 해군의 주가를 올릴 좋은 기회였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 해군에 배정된 예산은 전년도의 두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해군군령부와 정치계를 분주히 오가던 해군 과격파들은, '미국에 최대한 타격을 입혀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면 된다'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전쟁 개시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에게 전쟁은 기회였다.

한번도 고려되지 않은 '국민의 삶'
 
일본 해군은 미군이 놀랄만한 피해를 입혀 단기전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구상으로 전쟁에 찬동하였다. 그 배경에는, 해전 중심의 태평양 전쟁을 통해 일본 해군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 진주만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인 애리조나 전함 일본 해군은 미군이 놀랄만한 피해를 입혀 단기전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구상으로 전쟁에 찬동하였다. 그 배경에는, 해전 중심의 태평양 전쟁을 통해 일본 해군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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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미국의 금수조치로부터 나온 중대한 물음 앞에 '국민의 삶'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육군도 해군도 모두 스스로의 출세와 보신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육해군은 '통수권은 천황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명분으로 내각의 통제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각을 위협하고 압박하며 전쟁으로의 폭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은, 전 국민의 희생이 강요된 끝에 도달한 1945년 8월의 파국적 패망이었다.

그러나 패망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조차, 군부는 국민의 생명은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고자 했다.

총리에까지 올라서 정국을 완전히 주도했던 육군의 도조 히데키 대장은 이른바 '종전내각'의 총리로 해군 출신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추밀원장이 선출되려 하자 '육군은 이를 비토할 것'이라며 개전 당시와 비슷한 협박을 남겼다. 결국 스즈키 총리의 취임은 성사됐지만 육군 측에서는 '전쟁 계속'과 '육군 중심의 육해군 일체화'를 스즈키 총리에게 요구했다.

이후로도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을 주축으로 한 육군 측은 끊임없이 종전에 반대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군이 참전한 상황에서 조차 그들은 '천황제 유지' 및 '연합군에 의한 점령 기간 및 규모의 최소화'와 함께 '일본인에 의한 무장해체'를 종전조건으로 내세우고서 위 조건이 거부될 시 전쟁은 계속될 것임을 못박았다.

해군의 지도자들로부터도 국민의 생명은 외면됐다. 이미 정상적인 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쟁 계속을 위해 '가미카제(神風)' '카이텐(回天)' '신요(震洋)' '후쿠류(伏龍)'와 같은 특공병기들이 입안돼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특히, 가미카제 특공의 창시자였던 해군 군령부차장 오니시 다카지로 중장은 '2000만 국민이 특공을 나가면 일본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까지 항복에 반대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결국 그들이 속했던 군 조직이었을 뿐,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작전으로 미군에게 유효타를 입히는 것이 어려워지자, 군 지도부는 특공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에게 자폭을 강요했다.
▲ 출격하는 특공기를 전송하는 여학생들(1945년 4월) 정상적인 작전으로 미군에게 유효타를 입히는 것이 어려워지자, 군 지도부는 특공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에게 자폭을 강요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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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며 재임기간 내내 극단적인 정신론을 설파하던 도조 히데키 대장은 '황당하게도' 자살에 실패한 채 미군에게 생포돼 1948년 12월 23일 사형됐다. 항복에 반대하며 전 국민의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아나미 육군대신과 오니시 군령부차장은 '죽음으로 대죄에 사죄'한다는 취지로 종전 직후 자살했지만, 그들의 사죄는 국민에 대한 사죄라기 보다는 천황에 대한 사죄였다. 유혈낭자한 이 비극 위에서 그들에게 국민은 대의로서 한 번도 고려되지 못했다.

2021년의 8월, '그때의 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나'라는 물음이 다시 제기되는 이때에 국민의 삶은, 아니, 시민의 삶은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가. 8월의 숨막히는 더위 아래서,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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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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