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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그룹 '반려인의세계'는 반려동물에 대한 고민과 반려동물로 인해 달라지는 반려인들의 삶을 다룹니다. 이번 주제는 반려인들에 대한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나는 9살의 희고 길게 자라는 털을 가진 몸무게 4.5킬로그램의 개와 함께 사는 6년 차 반려인이다.

우리 개 '은이'를 만난 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2015년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 해 봄 대구의 한 민간 유기견 보호소를 방문했고, 그곳을 통해 은이를 만났다. 당시 3살(추정나이)이었던 은이는 낯선 우리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 했고, 나는 생각했다. 은이가 우리를 선택했다고.

그렇게 우리는 운명처럼 가족이 됐다. 물론, '운명'이라 여긴 한 편에는 '인간 중심적인 의도'가 있었다. 외동인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리라, 은이를 통해 아이가 생명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차 깨달아갔다. 은이는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님을. 은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생명 그 자체였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생명
 
우리 집 막내 '은이'. 은이는 존재만으로도 소중하고 경이로운 생명 그 자체다.
 우리 집 막내 "은이". 은이는 존재만으로도 소중하고 경이로운 생명 그 자체다.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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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은이와 함께 한 지난 6년 간 우리 가족은 참 많이 변했다. 은이의 관점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생명이 얼마나 따뜻한지, 다른 종과 교감하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매일 매일 알아갔다.

그 사이 주변도 달라졌다. 6년 전 은이를 입양했을 때, 나는 은이의 짖는 소리가 이웃에 민폐를 끼칠까 조마조마했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할 때면 곱지 않은 신경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랫집에도 윗집에도 개를 입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산책하다 점점 더 많은 개들을 만났다. 아파트 곳곳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주지 말라'는 표지판 대신 '더러운 쥐는 저희에게 맡겨주세요'라는 푯말이 생겼다. 길고양이들은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됐다. 우리 개를 바라보는 이웃들의 시선도 따스해졌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동물과 함께하는 삶'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종종 '웃픈' 경험을 한다. 바로 '따뜻한 시선' 속에 묻어나는 한국 사회 특유의 정서 때문이다. 내게 좋은 것이라면 남에게도 전해야 하고,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개인을 판단하며, 다양성보다는 순종문화를 추구하는 모습들은 반려견을 대하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애나 하나 더 낳지? → 개는 혼자 크면 안 돼!
 
은이와 가족이 되면서 생명의 온기가 얼마나 따스한지 알아갔다.
 은이와 가족이 되면서 생명의 온기가 얼마나 따스한지 알아갔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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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를 입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은이와 함께 아이의 하굣길에 마중을 가고 있었다. 그 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옆 동 이웃을 만났다. 나는 우리의 새로운 식구 은이를 소개했다. 그러자 그 이웃은 혀를 끌끌찼다.

"아이고, 애를 하나 더 낳으라니까. 하나는 외롭다고 했잖아. 애는 안 낳고 개를 키우면 어떡해?"

아이가 어리고, 내가 좀 더 젊었을 때 이웃들은 종종 이렇게 우리 가족을 걱정해줬다.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애 하나 더 낳으라'는 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다.

역시 은이와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벤치에 어르신 몇 분이 모여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은이를 불렀다. 사람을 매우 잘 따르는 은이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갔다. "아이고 이쁘네"를 연발하며 은이를 쓰다듬어 주는 그분께 나는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한 마리만 키워? 나도 개를 키우는데 둘이 좋아. 혼자는 외로워서 안 돼. 한 마리 얼른 더 들여."

"아이 하나 더 낳으라"고 했던 그 수많은 목소리들과 완벽하게 겹쳐졌다. 익숙했던 불편함이 다시 올라왔지만, '개엄마'가 처음인 나는 걱정이 앞섰다. 며칠 후 동물병원에 방문했을 때 수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정말 개도 혼자 크면 외로움을 타서 안 좋은 거냐고 말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그건 강아지마다 달라요. 한 마리 더 들였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힘들어하는 강아지들도 많아요. 은이는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게 강해서 혼자가 더 행복할 거 같은데요?"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외에도 은이와 길을 갈 때면 종종 낯선이에게 '왜 개에게 옷을 입히냐', '일주일에 한 번은 돼지고기를 삶아줘라(은이는 돼지고기 알러지가 있다!)', '살 좀 빼야겠다(나 말고 은이!)' 등 다양한 충고들을 듣는다. 물론, 이런 충고들은 반려인으로서 친근감과 자신에게 좋았던 경험들을 나누고픈 '선의'에 의한 것들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개들도 사람처럼 다 다르다.

성격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다른 개나 사람에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정도도 다 다르다. 그리고 그 개를 키우는 반려인의 사정도 각각 다르다. 때문에 선의에 의한 충고들이 때로는 '관심'보다는 '침해'라고 느껴지곤 한다. 반려문화가 깊어질수록, 반려인의 세계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유기견은 안돼요 → 좋은 일 하시네요

은이를 막 입양했을 무렵이었다. 은이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같은 동에 사는 이웃을 마주쳤다. 역시 반려인이었던 그 이웃은 내가 강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은이도 연신 꼬리를 흔들어 댔다.

"사람을 반기는 걸 보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개네요. 유기견들은 사람을 너무 경계하고 정도 잘 안주고 버릇도 나쁘더라구요. 어디서 데려오신 거예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차마 '유기견 출신'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친구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외국으로 가게 되면서 제가 키우게 됐어요."(적고 보니 참으로 부끄럽다!)

하지만,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고 '유기견 입양 프로젝트'를 펼치는 TV 프로그램까지 생겨난 요즘, 나는 더이상 은이의 출신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났어요"라고 당당히 밝히고 "우리 개도 보호소 출신이에요"라고 말해주는 동지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답변은 대체로 이렇다.

"아이고. 좋은 일 하셨네요."

나는 칭찬인 듯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딘지 씁쓸한 마음이 밀려온다. 개를 '사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일이고 '유기견 입양'은 봉사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물론 '유기견은 안돼요'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시선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유기견 입양이 좋은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명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게 상식이 되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무슨 몰티즈가 이렇게 커요?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나는 종종 반려문화에도 한국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나는 종종 반려문화에도 한국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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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와 산책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또 있다. 견종에 관한 질문이다. 특히 은이가 미용을 예쁘게 하고 길을 나섰을 때 사람들은 내게 종종 "어머, 예뻐라. 종류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예전에 나는 "몰티즈예요"라고 답했다. 그럼 십중팔구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엥? 몰티즈가 이렇게 커요? 비숑이랑 섞인 거 같은데요? 아니 푸들하고 섞였나?"

분명 병원에서 '몰티즈'라고 했는데 왜 다들 뭐라하는 걸까. 한 번은 인터넷에서 '몰티즈'에 대해서 찾아보기도 했다. 말려 올라간 꼬리, 까맣고 동그란 눈과 눈 주변의 선명한 아이라인, 은이의 몇몇 특징들은 '순종 몰티즈'와 일치했다. 하지만, '직모'와 '3킬로 이내' 몸무게는 은이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이런 말들이 은근 신경 쓰였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은이와 함께 잠시 거주했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했다. 그곳에선 길을 가는 은이에게 '견종'이 아닌 '이름'을 물어왔다. 간혹 견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우리 개는 비숑 50%, 몰티즈 25%, 푸들 25% 래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개죠." 나는 그때부터 은이를 그냥 '우리 개'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은이와 너무나 비슷한 개를 만났다. 닮은 모습을 알아봤는지 개들끼리도 반기는 눈치였다. 그때 그 이웃이 먼저 말을 건넸다.

"얘도 몰티즈 같은데 덩치 크다는 말 많이 안 들어요? 저희 애도 덩치가 크다고 하도 뭐라 해서.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우리 개인 걸. 이 아이는 (반려인들은 종종 개를 '아이'라고 부른다) 이름이 뭐예요?"
"은이요. 이 아이는요?"
"우리 애는 하루에요"


서로 개의 이름을 불러주자 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개들 덕분에 새로운 이웃을 알게 된 흐뭇한 날이었다. 반려인으로 산 지 6년이 넘어선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한다.

'개들과 사람들의 서로 다른 개성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다면, 생명은 사는 게 아님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도 사람도 출신이나 생김새로 평가받는 대신 고유한 이름을 먼저 물어봐주는 세상이면 참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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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에 대한 고민과 반려동물로 인해 달라지는 반려인들의 삶을 다루는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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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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