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 소녀가 숲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흰 옷을 입은 소녀를 찾을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쳐 부르지만, 그 외침은 커다란 까마귀 소리에 거듭 덮여 관객에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영화, 첫 장면부터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지난 7월 27일 개봉한 영화 <우리, 둘>은 노년 여성들의 사랑을 다룬 퀴어 로맨스다. '마도'와 '니나'는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 마도의 장성한 아들과 딸은 니나를 그저 어머니와 가까운 이웃으로 알지만, 사실 마도와 니나는 20년 된 연인이다.

둘은 집을 팔고 로마로 떠나 함께 살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마도는 자식들과 모인 자리에서 끝내 계획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답답함이 폭발한 니나는 마도에게 화를 쏟아낸다. 바로 그날, 마도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곧 깨어나지만 말을 할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이기도 어렵다.
 
자식들과 모인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려 하는 마도 연극계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 마틴 슈발리에가 눈빛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환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 자식들과 모인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려 하는 마도 연극계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 마틴 슈발리에가 눈빛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환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때부터 몇 미터 되지 않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서 어떻게든 마도 곁에 있으려는 니나의 시도, 아니 투쟁이 이어진다. 니나의 행동은 능동적인 것을 넘어 폭력적으로 보인다. 간병인인 뮤리엘이 마도의 집에 있는데도 몰래 문을 따서 들어갔다 나오고, 잠시라도 마도 곁에 있으려는 것을 계속 거절당하자 뮤리엘을 곤경에 빠뜨린 뒤 당당히 거래를 요구한다. 마도의 딸 앤이 마도를 데려간 후에는 그를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단 하나, 마도의 가족에게 자신과 마도의 관계를 차분히 설명하는 것만 빼고.

이런 니나의 행동을 보며 관객은 마도를 향한 간절함을 알게 되는 동시에 불편해진다. 왜 저래? 꼭 저렇게까지 해야 돼? 나도 그런 생각이 스치기는 했다. 그런데 연인 곁에 있기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것은 단순히 영화적인 설정일까.

퀴어의 삶이 스릴러적인 이유

이 영화의 스릴러적 연출에는 장면과 음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등 주변음을 극대화한 음향 연출은 불안감을 주며 장면에 빠져들게 한다. 관객이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을 거칠게 잘라내며 장면을 전환하고, 과감한 클로즈업샷과 미디움 롱샷으로 몰입감을 높인다. 이 영화가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한편 플롯 자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도 크다. 니나가 대담하게 마도의 집에 숨어들어와 있을 때 타인이 같은 집에서 돌아다니는 상황, 니나가 자신의 집에서 현관문의 외시경만으로 밖을 살피는 상황 등이 그렇다. 관객이 불안해지는 것은 '둘의 관계를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20년간 숨겨온 관계의 관성 속에 동참해 있는 것이다.

행동파인 니나는 왜 둘의 관계를 바로 털어놓지 않는 것일까. 짐작건데 니나는 마도가 애써 유지해 온 '좋은 어머니'라는 페르소나를 마음대로 무너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자식들이 적대감을 가져 오히려 마도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성 소수자들은 연인의 존재를 위장하곤 한다. 대외적으로 그들의 연인은 친구, 친한 지인, 직장동료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망가뜨릴 각오를 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니 어쩌면 퀴어의 삶 자체가 스릴러적이다. 연인과의 추억이 담긴 편지나 사진을 방 안에 숨기는 상황도, 직장에서 '촉'이 좋은 동료에게 의심 받는 상황도 스릴 넘친다. <우리, 둘>은 다소 과격할지언정 퀴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감각적인 연출로 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들을 갈라놓는 건 질병일까
 
마도와 니나  '오픈리 퀴어(주변 사람 대부분에게 커밍아웃을 한 성 소수자)'로 살아온 자유로운 성향의 니나가,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도에게도 커밍아웃을 하도록 설득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남편을 잃은 후까지도 가정을 지키는 마도를 떠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마도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으리라.

▲ 마도와 니나 '오픈리 퀴어(주변 사람 대부분에게 커밍아웃을 한 성 소수자)'로 살아온 자유로운 성향의 니나가,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도에게도 커밍아웃을 하도록 설득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남편을 잃은 후까지도 가정을 지키는 마도를 떠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마도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으리라. ⓒ 그린나래미디어(주)

 
첫 장면에서 사라진 소녀는 영화 중반에 두 번 더 등장한다. 한 번은 손자와 공원에서 놀아주는 마도가 수면 아래 잠긴 소녀를 발견한다. 또 한 번은 니나의 꿈 속이다. 마도의 곁에 가지 못해 초조해하던 니나는 호수 속에서 소녀를 건져 올리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깬다.

전체적 흐름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장면들은 둘의 무의식을 암시한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성 소수자는 표면적 자아와 내적 자아 간의 격차가 크다. 매순간 내면 갈등과 자기 검열을 겪으며 내적 자아는 병들기 쉽다.

최근 에세이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를 출간한 퀴어 아티스트이자 유머리스트 이반지하는 <일다>와의 인터뷰에서, 지인들이 아는 '김소윤'과 퀴어 아티스트인 '이반지하'의 분리된 정체성을 통합한 과정을 얘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는 이반지하에 대해서 '캐릭터 참 잘 잡았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캐릭터가 아니에요. (중략) 이게 퀴어로서의 삶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계획된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그냥 누군가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자아의 일치를 갈망한다. 생각, 말,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오픈리 퀴어인 니나는 자아 간의 갈등이 없지만, 마도는 그렇지 않다. 첫 장면에서 사라진 소녀를 마도의 내적 자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다. 마도가 억압하며 살아온 자아는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이를 알고 있는 니나는 꿈속에서 소녀를 끌어올린다. 이것이 이들의 사랑이 진정으로 동반자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언뜻 보기에 마도의 뇌졸중은 둘의 사랑에 큰 장애물이다. 그러나 결국 곪아 있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내어, 마도의 분열된 자아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도는 신체적 반응이 더딘 상황에서도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니나에게 가려 애쓴다.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은 오히려 해방되었다.

둘 사이의 진짜 장애물은 다양한 젠더 의식이 없던 사회 분위기와, 이를 의식해 마도가 만들어낸 사회적 가면이다.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확실해졌다. 그저 '서로의 곁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할머니 퀴어·할아버지 퀴어의 삶이 있다

<우리, 둘>의 배경인 프랑스는 1999년 'PACS'라는 두 시민 간의 연대 계약 제도를 도입했다(영화 속 시대는 빨라도 1990년 이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혈연이나 혼인 관계가 아닌 경우 주거 지원, 수술 동의, 장례 휴가, 상속 등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무연고 환자는 치료가 늦어지거나 장례를 치러줄 이가 없는 상황도 생긴다. 성 소수자에 한정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족공동체의 형태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2012년부터 꾸준히 발의되어 온 '생활동반자법'이 절실한 이유다.

영화는 니나의 이기적인 행동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연인, 가족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어떤 것인가. 또한 퀴어 영화를 싸고 있던 '아름답고 슬픈 청춘 로맨스'라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할머니 퀴어, 할아버지 퀴어의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이반지하의 묵직한 한 마디처럼.
덧붙이는 글 * 퀴어 아티스트/유머리스트 '이반지하'의 <일다> 인터뷰 (2021.03.10)
‘나는 역사적 사건이야’ 퀴어아티스트 이반지하의 전설 https://www.ildaro.com/8987

* 마도의 남편이 살아있을 때 둘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추측이며, 외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1990년대 이전으로 보이는 만큼, 마도가 젊었을 1930~60년대에는 이성애 규범에서 벗어나 성 정체성을 정립할 기회가 부족했다는 점, 자신의 성적 지향을 뒤늦게 깨닫는 마도와 같은 이들이 많았으리라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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