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 개편된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목차. 개항 이전의 전근대사는 전체 분량으로 치면 1/4에 불과하다.
 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 개편된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목차. 개항 이전의 전근대사는 전체 분량으로 치면 1/4에 불과하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한국사 교과서가 개편되면서 아이들의 역사 인식에도 적잖은 변화가 일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영역이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학습 부담이 크게 줄어든 점도 한몫을 했다. 단순 암기 과목이라는 오랜 편견에서 벗어나 탐구 과목으로 탈바꿈 중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전근대사에서 근현대사로 관심의 무게추가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해방 즈음에 진도가 끝나 아이들의 머릿속에 한국사의 시대적 범주는 고조선에서 기껏해야 일제강점기였다. 거칠게 말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니었다.

천오백여 년 전 인물인 광개토왕이나 을지문덕을 모르는 아이는 없지만, 불과 수십 년 전 장준하와 김준엽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다는 아이는 거의 없다. 광복 이후 활동했던 역사 인물을 아는 대로 말해보라면, 역대 대통령을 제외하곤 채 열 명이 안 된다. 배운 적이 없어서다.

근현대사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보니, 주위의 익숙한 문화유산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것들뿐이다. 복원된 것일지언정, 석탑과 목조 건축물 등은 족히 수백 년도 더 된 것들이다. 국보나 보물 등 지정 번호가 붙은 중요 문화재이지만, 봐도 그다지 감흥이 없는 이유다. 

문화재마다 사연과 내력이 있기 마련이지만, 오래된 것일수록 역사적 사실보다 전설이나 신화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구전을 통해 각색된 까닭에 들어보면 재미는 있어도 신빙성이 떨어져 자칫 역사가 희화화될 가능성이 크다. 오랠수록 기록이 부족한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현대사 유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남아있는 사료가 풍부해 오히려 다 챙겨 읽지 못하는 걸 걱정해야 할 정도다. 전근대사에 견줘 관련 유적도 훼손이 훨씬 덜한 상태여서 관심만 있다면 활자화된 기록 못지않은 정보를 줄 수도 있다. 무릇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근현대사 중심으로 개편된 한국사 교과서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일제강점기 역사다. 전체 4개의 대단원 중 당당히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다. 반만년 우리 역사 중 불과 35년간을 한 단원으로 설정할 만큼, 일제강점기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방증이다. 

참고로, 교과서의 4개 대단원은 이러하다. 고조선부터 개항 이전까지의 역사, 곧 전근대사가 첫 단원이고, 개항 즈음부터 국권 피탈까지의 역사가 두 번째 단원이다. 세 번째가 일제강점기이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마지막 단원이다. 

아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역사 용어

배운 적이 없으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공부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김구, 안중근과 윤봉길 외에도 여러 인물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젠 김좌진과 홍범도는 인지도로 치면 김유신과 이순신 못지않다. 김원봉을 비롯해, 윤세주, 김상옥, 김익상, 나석주 등 의열단원의 이름도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는다. 유관순밖에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김마리아와 차미리사, 남자현, 박자혜, 주세죽 등 여럿을 꼽는다. 

이완용과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그리고 박제순. '을사오적'의 이름은 요즘 아이들에게 필수 교양이 됐다. 다른 친일파를 대라면, 이광수와 최남선, 최린과 윤치호, 김성수와 방응모, 박흥식과 김활란 등의 이름이 술술 나온다. 일제강점기의 분량이 대폭 늘어난 교과서의 힘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친일파는 아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역사 용어가 됐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친일 청산 문제가 왜 여전히 화두인지 묻고 답을 찾아보려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다. 나아가 주변에 친일 잔재는 없는지 성찰하는 자발적인 움직임도 보인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교사로서 근현대사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교과서가 지나치게 근현대사에 편중돼 있다고 지적하지만, 역사 교육의 본령을 떠올려본다면 몽니로 비칠 뿐이다. 그런데도 잘못됐다고 여긴다면,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할아버지 세대의 삶과 아버지 세대의 삶 중 어느 것이 현재 아이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까?"

'의향'의 역사를 품고 있는 광주공원

때마침 '보물섬'을 발견했다. 광주광역시가 지정한 제1호 공원으로,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광주공원이 그곳이다. 이웃한 사직공원과 함께 사시사철 울창한 숲이 도시의 허파 구실을 한다. 도심 속 공원이지만, 찾아간 당일엔 방역지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이곳 광주는 모두에게 5.18 민주화운동으로 대표되는 고장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광주에 빚졌다'는 말도 5.18에 기인한다. 1980년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시내 곳곳에 사적지 표석이 세워져 그 의미를 더한다. 말하자면, 광주가 5.18이고 5.18이 광주다. 

그러나 5.18 당시 보여준 놀라운 시민의식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였을 리는 없다. 예로부터 광주는 '의향(義鄕)'으로 불려왔다. 광주시민의 몸에 유전자 정보(DNA)처럼 면면히 전해져온 불의에 맞선 저항 정신이 1980년 당시 다시금 표출되었을 뿐이다.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의향'이라는 별칭은 국권 피탈 이전인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학농민운동의 탯자리인 데다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직후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맞서 가장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한 곳이 광주를 비롯한 호남이다. 양반 유생은 물론, 머슴 출신의 의병장이 나올 정도였다.

기실 1909년 일제가 저지른 '남한 대토벌 작전'도 '호남 의병 초토화 작전'이라 명명해야 옳다. 당시 일제는 호남을 의병 세력의 근거지로 여겨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사료에 따르면, 구한말 의병의 수와 전투 횟수의 절반 이상이 호남에서 벌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두어 달 동안 희생당한 의병의 숫자만 1만 8000명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호남 의병이었다. 의병장을 비롯한 대부분은 현장이나 감옥에서 처형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의병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호남 의병의 전멸은 1년 뒤 국권 피탈로 귀결됐다.

그 '의향'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 바로 광주공원이다. 수백 년 전부터 최근까지 광주가 겪은 모든 역사의 자취가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쉬엄쉬엄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다 돌아볼 정도로 소담한 공원이지만, 이곳이 지닌 역사의 무게만큼은 가볍지 않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취
 
 광주공원 입구에 세워진 '김군'의 인물상. 이곳은 5.18 당시 무장한 시민군이 역할 분담을 하고 훈련하던 곳이다. 뒤로 5.18 사적지 표지석이 보인다.
 광주공원 입구에 세워진 "김군"의 인물상. 이곳은 5.18 당시 무장한 시민군이 역할 분담을 하고 훈련하던 곳이다. 뒤로 5.18 사적지 표지석이 보인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공원 입구에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새뜻한 인물상이 있다.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시신마저 유기당한 '김군'이다. 한 극우 인사로부터 '북한군 광수 1호'로 명명됐던 이다. 이곳이 5.18과 밀접하게 연관된 곳임을 암시한다. 인물상 뒤로 5.18 사적지 표석이 세워져 있다.

계단을 오르면,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 직후 무장한 시민군이 역할을 분담하고 훈련을 했던 작은 광장이 나온다. 이곳은 4.19혁명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을 둘러싸고 4.19를 기념하는 건물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는 마산, 서울과 더불어 4.19의 3대 성지로 불린다.
 
 광주공원 내 4.19 혁명 기념비. 다른 공사 관계로 기념비 주변이 어수선할 뿐더러 곳곳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언뜻 방치된 모습이다. 옆으로 보이는 계단이 일제강점기 신사에 오르던 길이며, 뒤의 숲 사이로 충혼탑이 보인다.
 광주공원 내 4.19 혁명 기념비. 다른 공사 관계로 기념비 주변이 어수선할 뿐더러 곳곳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언뜻 방치된 모습이다. 옆으로 보이는 계단이 일제강점기 신사에 오르던 길이며, 뒤의 숲 사이로 충혼탑이 보인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얄궂게도, 4.19 기념비 옆 가파른 계단은 일제의 잔재다.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세운 신사를 오르던 계단으로, 허물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신사가 있던 터는 지금 25m 높이의 큼지막한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6.25 전쟁 당시 희생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이다. 

충혼탑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에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취가 남아있다. 충혼탑이 둘 사이를 떼어놓고 있는 모양새다. 위로는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와 신동욱 항일사적비가 친구처럼 곁에 세워져 있고, 너머에선 친일반민족행위자 세 명의 '선정비'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에 넓고 높은 충혼탑이 세워졌다. 광주공원의 한가운데인 데다 가장 높은 자리다.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에 넓고 높은 충혼탑이 세워졌다. 광주공원의 한가운데인 데다 가장 높은 자리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심남일은 구한말 호남 의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수택'이라는 이름 대신 '남도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뜻으로 호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위세를 떨치던 그도 일제의 대토벌 작전으로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그는 대구까지 압송되지만, 공원 앞 광주천은 숱한 호남 의병의 처형장이었다.
 
 충혼탑 너머 북쪽 방향에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호남 의병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때 붙잡혀 순국했다.
 충혼탑 너머 북쪽 방향에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호남 의병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때 붙잡혀 순국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신동욱은 호남 의병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던 독립운동가로, 심남일 의병장과 동향 사람이다. 국권 피탈 후에도 독립의군부 등 독립군 부대에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16년에서야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었는데, 호남 의병을 뒷바라지한 숨은 영웅을 뒤늦게 알아본 셈이다.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와 이웃한 곳에 호남 의병과 독립군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 신동욱 선생의 사적비가 있다.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와 이웃한 곳에 호남 의병과 독립군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 신동욱 선생의 사적비가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두 분의 독립운동가를 알현한 뒤 충혼탑을 가로지르면, 광주향교 담벼락 너머에 낡은 비석들이 보인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여기에 한데 모아놓았다. 광주에 부임했던 관리들의 덕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개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 권율과 같은 익숙한 이름도 보인다. 

광주공원에서 다시 토론을
 
 공원 남쪽 비탈진 곳에 비석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데, 나란히 눕혀 놓은 세 비석이 눈길을 끈다.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취지로 광주광역시가 뽑아 놉힌 친일파의 '선정비'다. 비석의 주인은 왼쪽부터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다.
 공원 남쪽 비탈진 곳에 비석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데, 나란히 눕혀 놓은 세 비석이 눈길을 끈다.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취지로 광주광역시가 뽑아 놉힌 친일파의 "선정비"다. 비석의 주인은 왼쪽부터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귀퉁이에 벌러덩 누워있는 세 비석이 눈길을 끈다. 번듯하게 서 있던 걸 뽑아서 눕혀놓은 것이다. 비석의 주인은 각각 윤웅렬과 이근호, 홍난유다. 3.1운동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단죄해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취지로 광주광역시가 주관한 프로젝트다.

윤웅렬은 매국의 대가로 받은 작위를 아들 윤치호에게까지 넘긴 대표적인 친일파다. 이근호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친형으로, 동생 못지않은 친일 행각을 벌였다. 그나마 덜 알려져 있을 뿐 홍난유도 1909년 당시 광주군수로서 일제의 대토벌 작전에 앞장선 인물이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광주공원은 우리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곳 광주에 내려온 지 23년이나 됐지만, 자동차로 스쳐 지나쳤을 뿐 공원 안을 직접 걸어본 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 근현대사를 총망라한 이만한 답사지는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수업 시간 아이들과 함께 생각을 나눌 화두가 생겼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억해야 한다며 한쪽에서는 무언가를 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허문다. 또, 아무런 맥락이 없는 기념물이 마구 세워지며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태 전 국립 현충원의 친일파 무덤을 두고 아이들끼리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예상대로 파묘해야 한다는 주장과 존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논리와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라는 논리 모두 나름 설득력이 충분했다. 

교실이 아닌 이곳 광주공원에서 다시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신사를 허문 터에 충혼탑을 세운 것을, 4.19 기념비가 방치된 것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자취가 공존하고 있는 것을, 친일파들의 '선정비'를 부수지 않고 눕힌 채 존치시킨 것을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근현대사에 부쩍 관심이 늘어난 그들은 아마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댓글3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