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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식이 있냐?" 1948년의 어느 날. 목소리만으로도 철식은 낙연이임을 알 수 있었다. "얼른 들어와." 충북도청 앞에 있는 석교동의 육철식 자취방은 낙연이가 매일 들르는 방앗간이었다. 철식과 함께 자취하는 최석기는 한쪽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철식의 책상 옆에 앉은 낙연은 종이 위에다 뭔가 적었다. '소련은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다. 이북에는 공부도 다 무상으로 가르쳐주고, 소련 유학도 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란 철식은 물었다. "이게 뭔 소리냐?" "여기 쓴 그대로여." "참말로 북에 가면 공부를 공짜로 갈켜 주는겨?" 낙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철식은 낙연과 함께 이북에 가기로 결의했다. 육철식은 일제강점기에 부강심상소학교(부강초등학교의 전신)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야간인 청원중학교가 개교하자 득달같이 입학했다. 낮에는 충북도청 사환으로 일을 했다. 

이렇게 주경야독하던 철식에게 낙연은 언제나 새로운 정보를 물어다주었다. 그는 청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중앙공원의 '동지사'라는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다 주었다. <소련기행문>, <레닌의 생애> 같은 책을 읽으면서 육철식은 사회주의와 북한에 우호적인 감정이 싹텄다. 그리하여 육철식(1932~2020)은 1948년 10월 낙연과 함께 몰래 3.8선을 넘었다.(국사편찬위원회 구술수집사업, 「강동정치학원 출신 3인의 이야기」, 2008)

마을 사랑방의 정치학습

육철식보다 3개월 전에 3.8선을 넘어 북으로 넘어간 충북 영동군의 한 청년이 있었다. 영동군 양산면 호탄리에서 태어난 김철민(가명, 1927년생)은 양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갔다. 해방이 될 때까지 작은 가게에서 잔심부름을 했다.

김철민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 것은 1946년경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을 갔다온 김회백은 마을 청년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했다. 체계적인 정치학습은 아니었고, 사랑방에 마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1946년에 시행된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권법령 등을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이는 남로당 영동군당 차원에서 진행된 정치학습이었다. 이 교육을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남로당원이 되었다. 김철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1948년 김철민에게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남로당 영동군당에서 우수한 청년당원들을 북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청년당원 중 엄선한 이들을 북한의 강동정치학원에 보내 정치·군사 교육을 시켜 중간간부를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강동정치학원
 
 2008년 11월 14일 청주에서 열린 강동정치학원 출신 좌담회 현수막
  2008년 11월 14일 청주에서 열린 강동정치학원 출신 좌담회 현수막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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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계획이 수립된 이유는 다소 복잡하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1946년 초의 소위 '찬·반탁 투쟁', 대구 10월 항쟁으로 폭발된 전국적 시민 봉기, 1946~47년 미·소 공동위원회 구성 및 재개 투쟁,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투쟁이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좌절되자, 남로당의 투쟁전술은 빨치산 투쟁으로 바뀌었다.

빨치산 투쟁과 새로운 국면에서의 정치·사상투쟁을 위해서는 훈련된 당 간부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6년 10월 월북한 박헌영은 이의 해결을 위해서 1947년 9월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에 '강동정치학원'을 세웠다.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의 중간간부 육성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후일 북한의 사법상을 맡게 되는 이승엽이 총괄 운영했다. 강동정치학원은 2개월 반 과정의 군사반과 6개월 과정의 정치반으로 구성됐으며, 초기에는 남로당 중간간부 정치교육과 남파(南派)를 위한 유격대원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사건으로 남한 내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이 전개되자 유격대원 양성소 기능이 강화됐다.

강동정치학원을 거쳐간 사람으로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인민군 중장 출신이며 제3병단 부사령관인 남도부(본명 하준수), 만담가 신불출, 작곡가 김순남, 희곡작가 함세덕, 배우 문예봉 등이다.

이에 따라 충북 영동군당도 우수한 청년당원을 강동정치학원 등에 입교시켰다. 양산면 호탄리의 김철민은 1948년 7월 강동정치학원에, 황간면 신흥리 김◌숙은 1948년 12월에 평양 대성정치학교에, 영동읍 매천리 차◌철은 1948년 12월 13일 평양정치학원에, 심천면 이◌진은 정치공작원 강습차 1948년 9월 6일 철원학생파견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이후 남하하여 빨치산이나 군당의 중견간부 역할을 했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충북 영동군 2008년 피해자현황조사 보고서)

"잠시 후에 씨름대회가 있으니 전교생은 운동장으로 집합하기 바란다." 강동정치학원 4기생 김철민은 동기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황장수와 나윤출의 씨름 결승전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두 패로 나뉘어 응원전을 펼쳤다. 하지만 황장수는 조선의 대표적인 씨름선수인 나윤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윤출 승" "와!"하는 함성과 함께 사물놀이가 울렸다. 해방 3주년 기념 씨름대회가 열렸던 그 날은 1948년 8월 15일이었다.

정치학교의 하루 일과는 시골 출신 김철민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교육 분야도 다양했다. <소련 역사> <볼셰비키 당사>부터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정치학습까지 이루어졌다. 군사훈련은 기초적인 유격훈련부터 사격까지 이루어졌다. 김철민과 강동정치학원생들이 공동으로 이야기하는 이색적인 강좌가 있었는데 바로 '사교댄스'였다. 또 학생들이 직접 연극 공연을 하거나 영화 관람 등의 행사도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방문

어느날 수상 동지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철민은 동기생들과 함께 대청소를 하고 김일성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수상 동지가 입장하십니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김일성은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다. "동무들 고생이 많소. 조금만 더 참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혁명을 완수해 주기 바라오"라고 훈화했다.

한편 박헌영에게 강동정치학원은 남다른 존재였다. 1946년 월북한 이후 남로당계는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치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나마 강동정치학원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자 중간 간부를 재생산하는 유일한 정치교육기관이었다. 이렇다보니 박헌영은 여기에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박헌영이 자신을 '꼬마혁명가'로 별명을 지어주고 격려를 해 준 것을 뚜렷히 기억하는 육철식의 증언이다.

"아침식사를 하니까 청소도 유리창도 닦고 그러더니 박헌영 선생이 온다고 그러더라구. 근데 한 열시쯤 되니까 키가 작달막하니 안경 썼는데 그게 박헌영 선생이라고 그러면서 막 쫓아가서 앵겨서 그냥 끌어안고 박헌영 선생 만세도 부르고 막 그러니까 박헌영 선생이. 아 우리 혁명가들, 참 잘 있었느냐고 말이지. 이럭하고 나보고서는 "아이고 여기 꼬마 혁명가가 다 왔네?" 뭐 이러더라구"(국사편찬위원회 앞의 글)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제3군군학교 시절의 육철식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제3군군학교 시절의 육철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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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철민이 4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다시 3.8선을 넘은 것은 1948년 11월이었다. 원산 해금강과 설악산을 경유한 김철민 일행 약 60명은 3.8선을 넘으면서 3.8식 소총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매복해 있던 국군의 공격에 대열은 뿔뿔이 흩어졌다. 혼자가 된 김철민은 남하해 대구 대명동에서 생활하다가, 1년 만에 영동으로 올라와 접선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지가 아니라 국군 정보과 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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