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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도 사람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억겁의 시간 전부터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는 얘기. 사실 여부는 몰라도 그걸 들은 뒤부터 나도 그리 믿기로 했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애초에 내 탓도 아니고, 바꾸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것이라니! 이렇게 무한한 평안을 줄 믿음을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래서 삶이 편해졌는가 하면 물론 아니다. 인생에는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경우보다 뭐가 나은 선택인지 가려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 완벽한 결과를 바라다 보니 선택하기까지 에너지 소모가 컸고, 고민했던 문제일수록 결과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 더 후회가 됐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이거 말고 저거 먹을걸, 주머니에 넣지 말고 지갑에 넣을 걸,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내가 구사하는 문장의 반은 '-(으)ㄹ걸', '-았/었어야 되는데'라는 어미로 끝나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의 삶을 직접 살아본다면 어떨까

매트 헤이그의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노라 시드의 삶은 꼬일 대로 꼬여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남자친구와 파혼했고, 친오빠는 자신을 피한다. 심지어 직장과 알바도 잘리고, 키우던 고양이까지 잃는다. 아무튼 그야말로 인생 '폭망' 수준이다.

죽음을 택한 노라는 한 작은 도서관에서 정신을 차린다. 웬일인지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던 사서 아주머니가 있고, 서가에 꽂힌 모든 책은 노라가 살아보지 않은 삶들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멈춘 자정의 도서관에서 노라는 후회되는 선택의 지점을 하나씩 떠올리며, 살아보지 않은 삶 속으로 들어간다.
 
2020년 8월 출간 이후 영국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미국에서도 아마존, 《뉴욕타임스》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평단과 독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영화 <어바웃 타임〉제작사의 영화화 확정. 지금 책 광고를 하는 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은 마음의 정수가 책으로 탄생하니 이렇게나 잘 나간다는 것!
▲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2020년 8월 출간 이후 영국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미국에서도 아마존, 《뉴욕타임스》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평단과 독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영화 <어바웃 타임〉제작사의 영화화 확정. 지금 책 광고를 하는 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은 마음의 정수가 책으로 탄생하니 이렇게나 잘 나간다는 것!
ⓒ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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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까지 읽고 이런 생각이 들지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언가를 경험한다? 익숙한 설정이네.' 그리고 양자역학의 평행우주 이론을 그럴 듯하게 가져오려는 작가의 노력과는 별개로,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이렇게 많은 일에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라니. 캐릭터 설정이 무리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후회 목록' 중 상위 3개 정도가 떠오르고, 이 '어른을 위한 동화'가 묵혀온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것을 느꼈을 테니.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지난 시간에 집착하게 한다. 얼마 전 상담을 받던 중에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살 수 있다면 대학 졸업 후 바로 글쓰기에 올인하고 싶어요. 그럴 수 없지만요."

30대 중반까지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더 보려고 노력했지만, 일생의 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다. 감수성과 개성이 넘치던 시기로 돌아간다면 맞지 않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나만의 작품을 쓸 텐데. 그럼 몸과 마음이 고장 나지도 않을 텐데.

주인공 노라는 이런 꿀 같은 기회를 몇 번이고 누린다. 헤어진 남자친구와 결혼하는 삶, 고양이가 살아있는 삶, 친구와 다른 도시에서 사는 삶, 빙하학자로 사는 삶 등등등등. 새로 뛰어든 삶에 만족하지 못할 때는 다른 삶으로 손쉽게 옮겨간다.

우리가 살아보고 싶은 바로 그 삶 속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어떨까. 만족할 수 있을까? 노라는 성공한 선수로서 대중 앞에 선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삶에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슬픔이나 비극 혹은 실패나 두려움이 그 삶을 산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것들은 단순히 삶의 부산물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는 걸 이해하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질 거예요. 슬픔은 본질적으로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도요. 슬픔 없이 행복을 얻을 수는 없어요.

한편으로는 나도 알고 있었다. 당시 조급증이 심했던 나는 곧바로 성과가 나지 않는 일에 몇 년씩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뚝심 있게 글만 썼더라도 에고가 강했기에 그 과정 역시 몸과 마음을 다치게 했을 것이다.

'산다는 건 곧 문제를 만난다는 뜻'이라는 상담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소설 속 노라의 연설이 생각나서 슬쩍 웃었다. 혹시 내가 삶의 좋은 측면만을 기대한 건 아니었을까.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도 집안일거리가 전혀 안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이왕 하는 삽질, 감정의 가성비 챙기기

후회는 현재를 부정하고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동적인 태도다.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나약한 우리를 가만히 껴안아주지만, 반대로 정수리에 목도를 내리치는 사람이 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일생의 사랑과 우정에 배반당한 뒤 절망에 몸을 떨며, 그 절망을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승화했다.

그가 책에서 말한 '영원회귀'는 내가 믿었던 운명론과도 비슷하지만, 훨씬 소름 돋는 개념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지금과 완벽히 똑같은 삶이 무한히 되풀이되고, 지금의 삶도 과거에 셀 수 없이 여러 번 산 삶이라는 것. 평행우주론도 아니고 그저 '반복'이다.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 세상에, 이 모든 짓을 또 한다고? 이건 영원회귀가 아니라 '영원삽질'이잖아?

희한하게도 니체의 메시지는 그래서 강하게 마음을 흔든다.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과 공포에 무너지기를 택할 것이 아니라, 굴레를 껴안고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사자후 같은 명령. 비록 삶이 삽질 같다고 해도 네 운명은 너의 것이라는 그의 말이 '아모르 파티 Amor fati'(네 운명을 사랑하라')다. 

엄격해서 살짝 주눅이 들 뻔하지만, 그 말에서는 누구보다 사람을 연민하는 마음도 느껴진다. 동시에 가수 김연자님의 '아모르파티'만큼이나 흥을 불어넣어 주는 말이다. 빈틈없이 결정되어 있어서 무력해질 수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더 강해지고 즐거워질 수도 있으니까(이왕 하는 삽질, 노동요나 불러가며 하자).

감정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대체된다. 그래서 나도 '선택'하기로 했다. 후회, 열등감 같은 감정을 붙드는 대신, 미래에 도움 되는 '가성비 좋은' 감정에 시간을 쓰기로. 행복에 따라오는 슬픔과 허무도 함께 껴안겠다는 의지, 결과는 둘째치고 적어도 내 선택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 말이다.

말이 쉽다고? 맞다. 말이라 쉽다. 그래도 지금 나는 차라리 '분노'가 후회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밖으로 터져나가는 추진력을 가진 감정이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운명에 포효하며 "어디, 내가 질쏘냐!!" 하고 총력으로 뭔가를 만들어내 버린다면? 혹시 모른다.

소설의 저자 매트 헤이그 역시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죽음 앞에 섰었지만, 독서와 글쓰기를 만나 그의 소설들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부정적 감정이 덮쳐 오면, 그 힘을 어떤 '연료'로 바꿔 보는 거다. 뭐라도 하나 나오지 않을까?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사서 '엘름 부인'은 주인공 노라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일깨우는 스승이자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엘름 부인은 현실의 엘름 부인이 아니라 노라의 기억 속 인물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돌봐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걸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의 브런치 페이지에도 게시될 수 있습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은이), 노진선 (옮긴이), 인플루엔셜(주)(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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