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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봐! 잘 샀지?"
 "오~ 잘 골랐는데?"


여름 더위가 시작될 무렵, 동거인이 선풍기를 사왔다. 마트에서 2만9000원에 산 '저렴이'였는데 외관도 깔끔하고 성능도 괜찮아서 가성비 쇼핑이라며 함께 박수를 짝짝 쳤다.

이사 와서 새로 산 물건은 3만 원을 넘기는 물건이 잘 없다. 대부분 한숨 푹푹 쉬어가며 조립했거나 '당근' 해서 5층까지 끙끙 들고 올라온 물건들이다. 우린 미니멀리스트까진 못 되지만 합리적 소비를 하고 있어, 라는 나의 '한 줄 평'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2~3주 뒤였나, 자고 있는데 새벽에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스으윽!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침대 옆을 돌아본 순간, 1만8000원짜리 조립식 행거 두 개가 앞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쿵! 뚜둑! 옷이며 가방이며 스카프며 행거에 꾸역꾸역 걸고 담아둔 모든 게 바닥에 촤르륵 쏟아졌고 새로 산 선풍기는 옷더미에 눌려 두 동강이 났다. 달이 기울 듯 매일 조금씩 기울어가는 행거를 내내 방치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한창 신나게 자던 중이라 그러려니,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선풍기, 붙여보자"

날이 밝고 보니 방꼴이 빚쟁이가 들이닥쳤다 간 형국이었다. 에구, 에구, 앓는 소리를 내가며 행거 뼈대를 골라 분리하고, 단순한 구조의 새 행거와 선반을 주문했다. 물건을 받고 널브러진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나니, 흠, 뭐지? 방이 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훤해진 것은? 방을 자꾸 둘러보며 우리는 다시 손뼉을 쳤다. 전에는 뭔가 귀신 나올 것 같았지 않아? 잘됐네, 이거다 이거.

그런데 선풍기는 어떡하지. 반백수 둘이 생활비를 모아 대는데 행거에 선반에 선풍기까지 또 사면 이번 달 지출이 너무 빠르다. 일단 치워둔답시고 선풍기를 벽에 기대두었는데,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에 세워둘 건 뭐람.

내 팔이 선풍기를 스치며 선풍기는 다시 한번 바닥에 대차게 머리를 박았고, 그나마 이어져 있던 플라스틱 목 부분이 깨끗하게 분리됐다. 주섬주섬 만지는데 손에 끈끈한 윤활제도 묻어났다. 희고 깨끗한 아이가 참수형이라도 당한 듯 처참히 누워 있는 것이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미안했다. 가엾지만 별수 있나… 이 지경이 됐으니 버리는 수밖에.

그런데 늘 버리기 좋아하던 동거인이 말했다.

"우리, 붙여보자. 그 실리콘 같은 걸로."
"어? 웬일이야?"


본인이 직접 사들고 온 선풍기라 그럴까. 버리자고 하는 쪽과 고치자고 하는 쪽이 처음으로 뒤바뀌었다. 선풍기 머리가 무거워서 잘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자 했다.

다*소에서 실리콘 글루건을 사왔다. 분리해 둔 행거 뼈대를 골라 이리저리 선풍기에 대어 보다가 짧은 것 하나를 지지대 삼아 함께 붙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니, 그 정도론 안 돼."


에라이, 만리장성을 쌓아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실리콘을 녹이고 또 녹여 빈틈을 메우고 둘레를 두껍게 쌓았다. 그랬더니, 와, 큰 머리와 긴 목이 버티고 섰다. 돌려보니 잘만 돌아간다. 모양새도 처음과 비슷하다. 글루건 놓고 다시 박수. 캬, 우리 진짜 대단하다. 우리는 또 자화자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너진 행거의 한 토막(검정색)을 지지대 삼아 하중을 분산시켰다.
▲ 성공적인 수술 무너진 행거의 한 토막(검정색)을 지지대 삼아 하중을 분산시켰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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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들린다. 들린다."

자리를 멀리 옮길 때는 바닥 부분까지 같이 들어 신주단지 옮기듯 해야 할까 싶었는데, 머리채를 잡고 옮겨도 보란 듯 말짱하다. 허허. 평소 생활용품점에서 '플라스틱 쇼핑'을 하는 것도 비환경적이라 생각했는데, 쇼핑도 쇼핑 나름이다. 이렇게 큰 플라스틱을 하나 살려 썼으니.

쓸 때마다 보람도 쏠쏠하다. 말간 얼굴 그대로 해맑게 돌돌돌 돌아가는 녀석을 보고 있으면 '우리 풍기~' 하며 궁둥이라도 팡팡 두들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돈을 떠나, 저렇게 의연하게 일어서 주다니 정말 기특하지 뭔가. 선풍기를 보면서 감정이입 하는 것도 사람의 대단한 능력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2만9000원짜리 선풍기는 우리집에서 가장 대접받는 물건이 되었다. 깔끔한 새 행거와 선반보다도, 당근에서 만 원에 건진 오븐보다도 마음이 간다. 고쳐보길 잘했다.

고장도 삶에서는 다 쓸모가 있다

뭔가를 고치는 일은 사실 굉장히 성가시다. 살면서 보니 고장은 소비에 딸려오는 옵션이 아니라 당연하게 설정된 '디폴트값'이다. 보일러가 고장 나서 고치면 다음 날은 건조기에 문제가 생기고, 잔광이 남는 형광등을 해결해 놓으니 곧 벽 콘센트가 막히고 하는 식이다. 일상, 아니 일과의 일부다. 이러는 사이 '에잇, 할 일도 많은데…'라는 생각도 점차 엷어지는 걸 보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
 
문제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디 보자~' 하며 문제한테 방긋 웃어주라던데. 끝없는 고장도 '불완전한 상태가 완전한 상태'라는 가르침이려니 한다.
▲ 수리하다 내버려둔 벽 콘센트 문제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디 보자~" 하며 문제한테 방긋 웃어주라던데. 끝없는 고장도 "불완전한 상태가 완전한 상태"라는 가르침이려니 한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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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물건으로 보자면 고장이지만, 삶으로 보자면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도 모른다. 고치다 보면 간접적으로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새로 산 온수매트 소음으로 고민하며 잠들다 보니 어느새 내 귀가 수면 중 허용하는 백색소음의 범위가 넓어져 있는 경험처럼 말이다.

부활해준 선풍기 덕택에 동거인은 버리는 것보다 고치는 것이 속 시원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리고 나도 여러 물건을 손보다 보니, 내 손으로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물건뿐 아니라 나 자신도 고장 나면 잘 고칠 수 있을 것만 같다. 더 많은 일 속으로 나를 몰며 시간에 쫓겨 살 때는 돌보지 못했던 마음이다.

'진짜 생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자립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전기도 없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쓴다는 시민단체 '비전화공방'의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기도 하지만, 현대문명에 뼛속까지 물든 내가 '자연인'이 되는 것보다 우선 씩씩하고 용감한 생활인이 되는 것이 첫 번째 같다. 에어컨의 전력 사용량이 선풍기의 20배라는데, 선풍기만으로 이 더위를 나는 용기도 조금은 자랑스러워할 만하지 않을까?

이 기세를 몰아 막힌 벽 콘센트 세 군데를 다시 고쳐볼까 싶다. 인터넷을 보고 수리하다가 영 되지 않아 "아 몰라!" 하고 던져둔 지 두 달째인데, 이번에는 벽에서 끌려 나와 대롱대롱 매달린 콘센트들이 가여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찜통 더위가 좀 물러가면 분연히 일어서야지. 돌돌돌 씩씩하게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가 응원의 손짓 같은 것도 과몰입이겠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의 브런치 페이지에도 게시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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