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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화부터 소개했던 동구릉과 조선왕실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도록 하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 구역으로 크게 구분되는 동구릉은 동쪽 구역에서 금천을 건너 반대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건원릉의 바로 옆의 오솔길로 가야지 만날 수 있는 왕릉이 하나 더 있다. 

건원릉 뒷편의 고갯길을 넘어가다 보면 홍살문 아래에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무려 3기의 봉분이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한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임진왜란을 겪었던 조선 14대 왕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릉, 목릉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3기의 봉분이 각기 다른 영역에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홍살문에서 정자각 그리고 능침으로 이어지는 향로가 직선이 아닌 꺾여 있는 특이한 구조가 눈에 띈다. 정자각을 기준으로 가장 왼쪽에 있는 봉분이 의인왕후, 그다음이 선조, 가장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침이다. 

특이한 구조가 돋보이는 목릉 

경기 별곡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숱한 조선왕릉을 다녀 봤지만 동구릉의 목릉처럼 괴이하게 느껴지는 구조는 처음이다. 임진왜란으로 어수선했던 상황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동구릉에서도 가장 골짜기에 자리 잡은 목릉의 주인공 선조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그가 겪었던 두 번의 왜란은 조선왕조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변곡점으로 여겨질 만큼 큰 국가적 재난이었고, 전쟁 이후 동북아의 역사를 뒤흔들 만큼 많은 변화가 일어났었다. 하지만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점, 전쟁에 미리 대비하지 않아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부각이 되면서 가장 비판을 받는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마지막 안식처에서 그의 입장이 되어 변호를 조금 해볼까 한다. 우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은 몇백 년 동안 이렇다 할 전면전이 없었다. 반면 일본은 사상 유래 없는 봉건 영주들끼리 매일 전투를 펼쳤던 전국시대가 이제 막을 내린 상태였다.  

최고의 훈련 방법은 실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조선 나름의 대비는 하고 있었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초기의 일반적으로 밀렸던 형국에서 벗어나 경험이 쌓이면서 의병, 권율 장군, 이순신 장군 등의 활약으로 임진왜란을 궁극적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봉건 사회에서 왕이 한양에서 끝까지 항쟁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혔다면 끝까지 항쟁할 원동력을 잃지 않았을까? 역사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평가하는 건 좋지만 그 인물을 현대적인 상황에 빗대어 그대로 바라본다면 그 인물에 대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다. 다시 건원릉을 지나 금천을 건너 반대편으로 이동해 본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왕릉 중 하나지만 특유의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돈다.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의 전경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왕릉 중 하나지만 특유의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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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보기 힘든 울창한 숲, 그리고 경내에 흐르는 물길이 폭염으로 물든 이 땅을 시원하게 해 준다. 그런데 사람이 살기 좋은 만큼 벌레들도 활발하게 내 주위를 따라 움직인다. 덕분에 취재하는 내내 벌레와 사투를 벌어야만 했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꼭 벌레기피제를 챙기시고 방문하시길 바란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언덕 위로 인조의 왕후인 장렬왕후의 휘릉이 눈에 아른거린다. 혜릉과 함께 동구릉에서 가장 작은 권역이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영조와 정순왕후가 묻혀있는 원릉은 원래 효종의 자리였다가 여주로 이전하면서 파묘된 자리에 다시 들어온 독특한 케이스다.
▲ 영조와 정순왕후가 묻혀있는 원릉 영조와 정순왕후가 묻혀있는 원릉은 원래 효종의 자리였다가 여주로 이전하면서 파묘된 자리에 다시 들어온 독특한 케이스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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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릉까지 제법 긴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야만 하다. 아마 동구릉을 방문했었던 사람들이라면 이 무덤이 저 무덤 같아 보이고, 비슷비슷한 양식의 변주곡 같아서 지루함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릉을 살펴본다면 아마 눈이 번쩍 뜨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조선 후기 탕평책을 이끌었으며 우리에겐 사도세자로 유명한 조선 21대 왕 영조와 어린 신부 정순왕후가 원릉의 주인공이다.

원래 영조의 왕릉이 있던 자리는 선대 왕인 효종의 묫자리로 쓰였던 장소인데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자 능을 여주로 욺기고 한동안 비어있던 땅이었다. 파묘되었던 장소를 다시 왕릉 자리로 선택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혹자는 정조가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에 대한 앙금이 남아서 나름의 복수를 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왕권을 견제하던 신하들의 눈초리도 만만치 않았을뿐더러 정조의 스타일상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원릉에서 동구릉의 입구로 돌아가는 길이 이어져 있다. 사람들은 아마 지친 마음으로 여기쯤에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상당수 있지만 조금만 힘을 내서 마지막 3개의 왕릉을 둘러보길 추천드린다.     
 
정자각의 팔작지붕이 독특한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이다. 현종은 제위기간 내내 예송논쟁의 정국이 지속되었다.
▲ 정자각의 팔작지붕이 독특한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정자각의 팔작지붕이 독특한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이다. 현종은 제위기간 내내 예송논쟁의 정국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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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어린 나이에 즉위해 세도정치 하에서 힘을 쓰지 못한 헌종의 경릉은 왕을 비롯해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봉분이 늘어선 삼연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예송논쟁으로 재위 내내 시달렸고, 후궁을 따로 들이지 않았던 현종과 명성왕후 의릉인 숭릉은 반드시 가봐야만 하는 곳이다.

숭릉 구역은 릉 남쪽에 있는 연지에 수많은 희귀 조류를 보호하기 위해 비공개로 막혀있다가 몇 년 전에 개방되었다. 눈여겨볼 점은 다른 왕릉들의 정자각이 맞배지붕의 형태인데 여기 숭릉의 정자각만 유일하게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었다. 이로써 조선왕릉의 최대 분묘 군인 동구릉의 답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구리타워의 탁 트인 전망 보고 갈까 

유례없는 더위 속에 상당한 시간 동안 야외에 있었더니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구리는 가을에 방문하면 코스모스 밭이 유명한 구리한강공원과 장지동의 호수공원이 산책하기 좋은 명소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서 더 이상 야외 활동을 하게 되면 나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만 같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평소 강변북로를 타며 눈여겨 둔 구리의 명소가 하나 있다. 구리 자원회수시설 소각장 굴뚝을 이용하여 100미터 높이에 만들어진 구리타워가 바로 그것이다. 구리시는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은 데 비해 인구가 많으므로 쓰레기를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게 절실한 과제였을 것이다.      
 
자원회수시설의 굴뚝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구리타워는 구리시를 상징하는 명소 중 하나다.
▲ 자원회수시설의 굴뚝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구리타워 자원회수시설의 굴뚝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구리타워는 구리시를 상징하는 명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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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설의 건립을 통하여 매립지를 따로 확보할 필요가 없어졌고, 쓰레기를 안정적이고 위생적으로 처리하여 공해 없는 생활환경과 환경 보전, 에너지 절감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구리타워의 주변으론 수많은 체육시설이 자리해 구리시민들의 여가 활동에 큰 도움도 주니 이것이야 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다.

밖이 내려다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전망대로 올라간다. 전망대의 바로 위층에는 회전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현재는 리모델링을 위한 공사 중이라 2022년 1월까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전망대에선 구리는 물론 아차산 저 멀리 잠실 롯데타워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높은 곳에서 한없이 바라보는 전경은 언제나 훌륭하다.  
 
구리타워에서는 구리시내와 아차산은 물론 서울 잠실 등의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 구리타워에서 바라본 서울외곽순환도로  구리타워에서는 구리시내와 아차산은 물론 서울 잠실 등의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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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구리의 제일 번화가인 돌다리에 위치한 곱창거리의 여운을 즐겨본다. 아차산 고구려 대장간 마을에서 시작한 여정은 조선시대의 최고 왕릉군인 동구릉을 거쳐 자원회수시설을 활용한 구리타워까지 이어졌다. 특정 시대를 강조하기보다 구리가 가진 역사, 앞으로 만들어갈 문화를 공존하게 한다면 구리의 정체성이 보다 확고해지지 않을까 한다. 

덧붙이는 글 | 9월초 경기별곡 시리즈 1편이 책으로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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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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