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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지난 5월, 어버이 날을 맞아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적당한 의자가 있어 쉬어가려 앉았고, 우리는 '어버이은혜'를 불렀다.
 
올해 88세를 맞이한 아버님은 지난해부터 급격히 노화현상을 보이며 기억력이 떨어졌다.
 올해 88세를 맞이한 아버님은 지난해부터 급격히 노화현상을 보이며 기억력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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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이면서 부모가 된 이후, '어버이은혜'는 박수치며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로 끝나는 기념노래가 아니었다. 자녀를 키우며 겪었을 부모님의 수고를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아버님께 노래를 청했다.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구나."

평소 말 한 마디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아버님 입에서 '사철가'가 흘러 나왔다. 뜻밖이었다. 손사래를 예상했던 자녀들은 숨을 죽이고 어머님이 장단을 맞추었다. 노래가 이어지면서 긴장감은 사라지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우리 모두는 '얼쑤!' 추임새를 넣었다. 영화 서편제 OST였지만 가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 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 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봄은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은 황국 단풍도 어떠한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여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 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듯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다. 올해 88세를 맞이한 아버님은 지난해부터 급격히 노화현상을 보이며 기억력이 떨어졌다. 노래 중간 어디쯤에서 끝날 것이라 여기며 가사에 귀를 기울였다.

흥을 돋우는 창인 줄 알았던 우리는 노래 후반부에 접어들자 점점 숙연해지고 노랫가락 굽이굽이 아버님의 마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때 빛났으나 이제는 나이든 아버님

한때 빛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혼 후 바라본 아버님의 중년은 자녀들이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인품과 재력을 갖고 계셨다. 과묵하신 것도 멋스러워 보였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모습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보증으로 많은 것들을 잃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당신 탓으로 돌리는 아버님의 입은 더 굳게 다물어지고, 급기야는 식사 내내 한 마디도 안 하시는 경우가 허다했다.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 여러 번 캐물으면 귀찮은 표정으로 심드렁한 단답형 대답이 전부였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도 외딴 섬에 홀로 있는 쓸쓸함이 느껴졌다.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아버님, 언제 사철가를 다 외우셨어요?"

역시나 아버님은 말이 없었다. 노래를 즐기는 편도 아닌데 그 긴 가사를 외우기까지 수없이 불렀을 그 시기, '사철가'는 아버님의 심정을 대신해 준 절규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이 모두 백년을 산다 해도 잠든 날과 병든 날과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이라는 대목에서 우리의 눈은 허공을 향했다. 반백이 된 자녀들이 이해 못할 가사가 아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아버님의 '고백'으로 들렸다.

완창에 가까운 아버님의 노래실력으로 무거워질 분위기는 박수와 환호로 채워졌다. 이에 질세라 어머님도 한 곡조 뽑으셨지만 '사철가'의 강력한 여운을 이기지 못했다. 노래를 통해 가장 긴 말씀을 들려주신 아버님의 '사철가'는 돌아오는 차 안에까지 따라와 우리 입에서 흥얼흥얼 이어졌다.

시부모님은 올해 결혼 61주년을 맞이했다. 노인 유치원을 손잡고 다닌 지 1년 반이 되면서 더 다정해 보인다. 수다쟁이 어머님과 무한반복 들어주는 아버님의 부부조합이 환상적이다. 부부애란 그런 것일까.

매주 토요일 저녁은 외식하는날. 입맛 없을 부모님을 위해 식당을 물색하는 일이 한 주간의 미션이 되고 있다.

"아버지, 약주 한잔 하실래요?"
"......"
"아버지, 안주도 좋은데 한잔 하셔야죠."
"......"


두세 번 권하고 나서야 어렵게 '맥주 한 잔'을 허락받았다. 올해 들어 그리도 좋아하시는 술을 마다하는 때가 많아져 안타까워 하던 차에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럴 줄 알았어. 아버지 좋아하시는 생선이잖아."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및 브런치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아버님, #사철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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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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