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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뒤적거리다 뜨악했다. 첫 성 경험 시기가 빨라진 청소년들이 올바른 피임 방법을 알지 못해 비닐봉지를 피임 도구 대신 사용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가히 충격적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성장도 빠르고 발육도 남다른데, 성 지식은 여전히 뒤처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199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우리가 받았던 '성교육'이라는 것도 참담한 수준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순결 사탕'이라는 게 존재했다. 수련회 하루 전날, 담임 선생님은 정체모를 하얀 사탕을 나눠주며 다른 남학교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 함부로 말을 섞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른쪽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한 바퀴 원을 그려보라고 했다. 우리는 순순히 각자 자리에서 원을 그렸다.

그러고선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방금 그린 원 안으로 절대 남학생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돼."

우리는 수군거렸다. 어떤 친구는 그 사탕이 남자의 정액으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그 사탕에 성욕을 억제하는 물질을 넣었을 거라고도 했다. 듣기만 해도 역겹고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들의 진위를 가릴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그저 반신반의하며 하얀 사탕의 껍질을 벗겨 입 안에 넣고 요리조리 굴리며 조금씩 맛을 느끼는 수밖에. 

성교육 시간에 본 비디오... 충격이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허락된 성교육이란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는 맹목적인 말들에 강박적으로 세뇌당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허락된 성교육이란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는 맹목적인 말들에 강박적으로 세뇌당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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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비디오를 보여줬다. 4~5개월가량 된 태아를 낙태하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였다. 입구가 길고 좁은 청소기 같은 것이 불쑥 까만 자궁 속으로 난입한다. 태아는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마치 그 공포스러운 기구가 자신을 파괴하려 한다는 것을 진작 알아챈 것처럼. 그러나 그 기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아를 조금씩 조금씩 빨아들인다.

우리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살인 현장을 코 앞에서 본 것 같은 충격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비디오 잘 봤지? 봐, 이렇게 작은 태아도 생존본능을 가진 생명이고, 때문에 낙태를 하는 것은 살인과 다름없단다. 그래서 너희들이 너희의 몸을 잘 간수해야 되는 거야."

이후에도 성교육 시간이 되면 같은 내용의 반복이 이루어졌다. 무지하고 야만스러운 가르침 아래에서 우리에게 '성'과 관련한 것은 그것을 단순히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금기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 돼버렸다. 그 시절 우리에게 허락된 성교육이란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는 맹목적인 말들에 강박적으로 세뇌당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엄마 아빠가 벌거벗고 침대에 같이 누워있으면 아빠 몸에서 튀어나온 아기 요정이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서 아기가 탄생한다는, 감동도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의심 없이 들을 수 있던 내 무식함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콘돔과 경구 피임약을 비롯한 피임의 세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임신과 출산의 세계에 대해 일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렵지 않게 입수한 야동, 그러나...

공교육은 실패했다. '성'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전혀 달래주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호기심이 왕성했던 우리는 금기의 영역을 넘어서기로 결심했다. 야동을 보기로 한 것이다. 야동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Z세대에게 인스타그램과 유튜브가 있다면, 당시 우리에겐 세이클럽이 있었으므로. 세이클럽 동호회의 익명게시판에서 어렵지 않게 야동을 입수했다. 게시물들의 제목들은 대략 이러했다. '잠든 누나를 @#$@', '말 잘 듣는 @#$@#', '21살 여대생과 #$%#$%' 이하 중략.

영상은 대부분 비슷한 맥락이었다. 사실 맥락이라 이름 붙일만한 흐름이 전혀 없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한 명씩만 있으면 다행이다). 어떠한 서사나 합의도 없다. 이들은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당히 비경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낭비 없이도 앞에 서 있는 상대방의 옷을 벗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눈만 맞으면 동물적인 모습으로 기계적인 섹스를 한다. 욕구 충족이라는 야만스러운 기치 아래, 기괴한 체위들과 짐승 같은 신음만이 뒤섞인 대환장 파티의 현장. 그것이 내가 처음 접한 야동의 세계였다.

정확히 이유를 짚을 수 없었으나, 처음 야동을 본 이후 며칠간은 야동의 '야'자만 떠올려도 구역질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른들이 깊이 깊이 묻어두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이 열어젖힌 것에 대한 벌일까. 섹스란 이리도 역겹고 동물적인 것이어서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저 너머의 음지에 꼭꼭 숨겨둔 것일까.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처음으로 야동을 접한 나의 충격은 상당했다. 

폭력적인 카메라의 시선
 
 그 시절 우리에게 허락된 성교육이란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는 맹목적인 말들에 강박적으로 세뇌당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허락된 성교육이란 몸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는 맹목적인 말들에 강박적으로 세뇌당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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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조금 더 어른의 모습에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어른의 시각에서 본 야동은 괜찮을까? 전혀 괜찮지 않다. 아무리 나이가 든다고 해도 폭력적이고 불쾌한 관계 묘사와 생식기만 남아버린 것 같은 자아 없는 인물들, 맥락 없는 동물적인 섹스 장면이 익숙해 질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것은 카메라에 비친 여자의 모습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폭력적이다. 마치 고깃 덩어리에 꽂히는 정육점의 벌건 조명처럼 여자의 신체 구석구석을 관음 하듯 비춘다. 카메라는 철저히 보는 이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지점들만을 포착하고, 그 안에서 여자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

사각 프레임 안에서 여자는 파트너의 손길만을 애타게 갈구하고, 그저 파트너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이는, 훈련이 아주 잘 된 동물 한 마리일 뿐이다. 철두철미하게 쾌락을 위한 쓰임을 명령 받은 도구일 뿐이다.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그에게서 우리는 그에게도 개인적 취향이나 선호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까?

2014년 1월 방송된 KBS <유자식 상팔자>에서 출연자인 배우 우현은 '착한 야동'을 제작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야동은 매우 폭력적이고 자극적인데, 아들에게 그런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일일이 말해주기 어려우므로 직접 '착한' 야동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우현의 이 말에 적극 동감한다. 그의 말처럼 국가 차원에서 착한 야동을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두가 끊임없는 논의와 논쟁의 대상이 되어 광장에 던져진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다.

사랑에 빠진 누군가와 함께하는 행복하고 기분 좋은 섹스. 외도와 불륜과 치정이 없는, 그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섹스를 보통의 서사들로 다루는 순한 맛의 야동은 없을까. 섹스는 사랑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줄, 착한 야동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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