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 왼쪽 책상에서는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 왼쪽 책상에서는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서명하고 있다.
ⓒ NARA / 박도

관련사진보기



전쟁과 사랑
 
"6․25전쟁은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힘없는 백성들만 소련제, 미국제 무기를 들고 한 핏줄, 내 형제들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무참히 죽이는 강대국의 땅따먹기 노름에 놀아난 가엽고도 불쌍한 어릿광대 꼴이 됐다."
 
윗글은 올 가을에 선보일 졸작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의 한 대목이다. 나는 이즈음 이 작품 마무리 교정 작업이 한창이다. 엊그제는 이 일에 빠져 지내다가 허기가 져서 교정쇄를 가방에 넣은 채 가까운 밥집으로 갔다.

밥 주문을 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밀린 탓인지 늦었다. 실내는 넓은데다가 에어컨 바람으로 쾌적했다. 나는 '박도글방'에서 비지땀을 흘리다가 에어컨 바람을 쐬자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교정쇄를 펴고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내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밥집 주인이 다가와 말했다.

"손님, 진지 드시고 하세요."

밥상 한 모서리에 주문한 메뉴가 나와 있었다.

"아, 네."
"어찌나 몰입하시는지, 계속 지켜보다가 왔어요." 


나는 그제야 하던 일을 제치고 밥숟갈을 들었다. 나는 이 작품을 위해 이 복중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을 파내고 있다.
 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을 파내고 있다.
ⓒ NARA / 박도

관련사진보기

   

1967년 대학 3학년 재학 때 당시 국어국문학과장 정한숙 교수는 '창작연습' 강의시간이면 틈틈이 후배요, 제자들을 담금질했다.

"한국인은 지난 6·25전쟁으로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 작가에게는 큰 축복이다. 국토분단에다 골육상쟁의 전쟁, 이보다 더 좋은 작품 제재(題材)가 어디 있느냐? 너희 가운데  6·25전쟁을 깊이 공부하고 대작을 쓰라."

꼭 30년이 지난 1997년 9월, 나는 정한숙 선생의 마지막 길에 운구하면서 관속의 고인에게 말씀 드렸다.

"선생님, 제가 6·25전쟁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겠습니다."
"그래, 박도! 네 말을 여태 잊어버리지 않았군. 고맙다. 작가는 바둑판(원고지)을 메울 때가 가장 행복한 거다. 통일로 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되는 대작을 쓰라."


관 속의 스승님이 벌떡 일어나 내 등을 두드리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나는 이 작품을 쓰고자 네 차례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뒤졌고, 6.25전적지 곳곳을 내 발로 답사했다. 심지어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 참가를 통해 마음대로 갈 수도 없는 북한 땅 묘향산, 청천강도 헤맸다. 다음은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정전협정 당일(7월 27일)의 서술이다.
 
이 작품의 배경인 북한의 청천강(2005. 7. 24. 촬영)
 이 작품의 배경인 북한의 청천강(2005. 7. 24. 촬영)
ⓒ 박도

관련사진보기

 
1953년 7월 27일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마침내 동쪽 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들어와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었다. 정전회담장은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 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이날 유엔군 측 해리슨과 공산군 측 남일은 각기 서른여섯 번씩 서명했다. 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는 하늘에서 무력시위라도 하듯, 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양측 대표는 10여 분만에 서명을 끝냈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 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은 회담장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정전'이었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6·25전쟁 정전협정은 소련이 정전협정을 제의한 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 회담 끝에 이루어졌다. 이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기자단도 유엔군 측 기자는 1백 명 정도였고, 일본인 기자도 10 명이었는데, 한국기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한국인 참여 없이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 그제야 155마일 휴전선에 비로소 총성이 멎었다. 3년 1개월 남짓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양측이 승자라고 서로 우기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기간 양측 사상자는 약 500만 명(민간인 포함), 그리고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전쟁 전 일직선 38도선 대신에 전쟁 후 구불구불한 곡선의 군사분계선으로, 또 다른 단장의, 원한과 통곡의 휴전선을 남겼다.

그날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정전협정문에는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 행위를 중지하도록 돼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유엔군 폭격기들은 북한의 비행장과 철로들을 폭격했고, 유엔군 해군 전함들은 동해바다에서 원산항 쪽으로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정전 직전 최후 순간까지 서로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전쟁에서 교전국간 페어플레이나 자비를 바랄 순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 시작인 북한의 기습 남침에서부터 유엔군의 마지막 북한 폭격까지 이 나라 백성들의 생명이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1951. 9. 20. 전쟁은 한 인간을 짐승처럼 만든다. 북한의 한 병사가 짐승처럼 기어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1951. 9. 20. 전쟁은 한 인간을 짐승처럼 만든다. 북한의 한 병사가 짐승처럼 기어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 NARA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3. 7. 31. 정전협정 후 비무장 군사분계선에 세울‘군사분계선’표지판들.
 1953. 7. 31. 정전협정 후 비무장 군사분계선에 세울‘군사분계선’표지판들.
ⓒ NARA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전쟁과 사랑>은 2021년 9월 초에 '눈빛출판사에서 출시될 예정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