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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깃발과 당시 집강소 간판 당시 동학 깃발과 집강소 현판
▲ 동학깃발과 당시 집강소 간판 당시 동학 깃발과 집강소 현판
ⓒ 고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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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 지도부(남접)는 각 군현에 집강을 임명하고 이들이 지역에서 집강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전주에는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전라도 53개 군현의 관청 안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농민이 직접 참여하는 일종의 민정(民政) 기관이었다.
 
집강소에는 책임자인 집강 밑에 서기(書記)ㆍ성찰(省察)ㆍ집사(執事)ㆍ동몽(童蒙) 등의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맡게 하였다. 호남 일원에 정부의 행정관청 안에 동학농민군의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이원화 형식의 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동학농민군이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피신했다가 돌아온 수령들은 형식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고, 군현의 이서(吏胥) 들까지 동학에 입적한 경우에만 행정사무를 맡겨서 실질적으로 동학혁명군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집강소는 동학혁명 이전부터 향촌사회에 있어왔던 민간의 자치기관이었다. 글자 그대로 지역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민간조직체이다. 1860년 전라도 구례에서 간행된 『봉성현지(鳳城縣志)』의 향규(鄕規)에는 "향청(鄕廳)에서 과실을 범하거나 폐단을 일으키면 집강이 보고 들은 바를 문서로 적어 관청에 제출하도록"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향촌사회에 집강이 있어서 그 지역사회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안동에서도 비슷한 사례의 기록이 『안동부읍지(安東府邑誌)』에 나타난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집강소의 설치와 집강소의 농민통치는 비록 전라도 53개 군현의 일부지방에서의 일이지만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농민의 정치를 실행했다는 면에서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특이하고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집강소의 농민통치의 내용과 성격 여하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이 좌우되는 측면이 매우 크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집강소'는 반드시 심층에서 밝히지 않으면 안 될 한국근대사의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주석 10)

집강소 12개조 행정요강

① 도인 (동학교도)과 정부와의 사이에 오래 끌어 온 혐오의 감정을 씻어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해 내어 일일이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은 엄징할 것.
④ 부랑한 유림과 양반은 징습(懲習)할 것.
⑤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겨버릴 것. 
⑦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는 모두 거둬들이지 말 것.
⑨ 관리의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외적과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돌릴 것.
⑫ 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케 할 것. (주석 11)

동학군들은 신바람이 났다. 비록 전주성에서 철수하면서 한 때 패배의식에 빠지기도 했지만 각각 연고지를 중심으로 집강소 운영에 참여하면서 신바람이 났다.

"농민군들은 무기를 돌려주고 때로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 씩 무리를 지어 각기 흩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흩어질 적에도 온통 승리감으로 기세가 높았지 결코 패배하여 잔병(殘兵)으로 고향에 기어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앞에서는 칼춤을 추며 대열을 이끌었고 뒤에서는 농민군들이 검가(劍歌)를 부르며 뒤따르고 있었다." (주석 12)

각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는 '관민합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전봉준이 전라관찰사 김학진의 초청으로 전주감영에 들어가서 '관민상화지책(官民相和之策)'을 논의할 때에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집강소가 순전히 전봉준의 제의로 설치하게 된 동학농민군의 자치기관인가, 관민합의에 의한 합작기관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① 집강소설치와 관련하여 5월 7일 '전주화약'에서 전라관찰사와 농민군이 합의한 것은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관군에 내어주고 자진 해산하여 각각 자기의 출신지역에 돌아가는 대신 동학농민군은 '면리집강(面里執綱)'을 임명하여 관변측이 폐정개혁을 단행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한 것인데,  

② 5월 8일부터 동학농민군은 귀향하자 무기를 풀고 농민군을 해산한 것이 아니라 무장한 채 농민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1차 농민전쟁 때의 농민군의 '군(郡)' 수준의 '집강' 임명의 예에 따라 전라도의 다수 지역에 '군집강소'를 설치했으며, 

③ 농민군측과 양반관료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 격화되고 첨예화되자 6월에 전라감영에 초청하여 관민상화지책을 의논한 결과 전봉준 측의 제의에 따라 이미 다수 설치된 '군집강소'를 사후적으로 추인하여 합법화시켜주고 도내 행정의 질서를 수립하는데 동학농민군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주석 13)
  
동학지도부에서 제안하여 설치한 것을 관측에서 동학농민군의 협력을 얻고자 사후적으로 추인했다는 주장이다. 동학군이 호남지역 53개 군현에 설치ㆍ운영한 집강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자치기구였다. 이것은 프랑스혁명 후 1871년 '빠리꼼뮌'에 비해 13년 뒤의 일이지만 세계사적인 변혁운동이다.
 
프랑스의 『인민의 외침(Le cri pu peuple)』은 「축제(La fête)」라는 표제의 논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꼼뮌이 선언되는 날, 그것은 혁명적이고 애국적인 축제의 날, 평화롭고 상쾌한 축제의 날, 도취와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과 환희에 넘치는 축제의 날이다. 그것은 1792년의 사람들을 우러러본 나날에 필적하는 축제의 하루이며, 제정 20년과 패전과 배반의 여섯 달을 위로해준다.……꼼뮌이 선언된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이다.

내일은, 시민병 제군, 어제밤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꼼뮌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詩)가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된다. (주석 14)


주석
10>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161쪽, 일조각.
11> 오지영, 앞의 책, 162쪽.
12> 이이화, 앞의 책, 340쪽. 
13> 신용하, 앞의 책, 183쪽.
14>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빠리 꼼뮌까지』, 284쪽, 까치, 1980.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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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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