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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분재작품들이 돌과 정원수 등과 조화를 이루며 관람로를 따라 배치돼 있다.
▲ 전망대에서 본 정원 풍경 분재작품들이 돌과 정원수 등과 조화를 이루며 관람로를 따라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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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생각하는 정원'에서 우아한 하루를 보냈다. 어제 성범영 원장으로부터 오랜만에 차 마시러 한번 놀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뜸했던 것 같다. 성 원장의 생각하는 정원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어 자주 오가던 터였다.

1995년 10월의 일이니까 벌써 24년 전의 일이다. 당시 몸담았던 신문사 초청으로 중국 인민일보의 판징이(范敬宜) 총편집이 서울에 왔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중국 최고의 권위지이고, 신문 제작의 총책임자인 총편집은 경영을 맡은 사장과 동격으로 장관급이다. 판징이 총편집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를 안내하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다.

심포지엄 등 서울 일정이 끝난 후 판 총편집은 제주도에 가보기를 원했다. 오래전 일이어서 세세한 일정은 대부분 잊었지만, 분재예술원을 안내한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전시된 분재작품들을 감상하고, 원장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붓글씨로 방문 기념 휘호를 남겼다. 판 총편집은 글뿐 아니라 붓글씨로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다. 분재예술원을 방문한 그날 밤 숙소에서 나에게도 붓글씨 작품을 2점 써주었다.

'생각하는 정원'이 된 분재예술원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나는 분재예술원을 잊고 있었다. 성범영이라는 이름도 기억에 없었다. 더욱이 분재예술원은 2007년 생각하는 정원으로 바뀌었으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5년 9월 신문에 난 성 원장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그곳이 바로 옛날 판징이 총편집과 함께 방문했던 분재예술원임을 알게 됐다.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성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20년 전 인민일보 총편집을 안내해서 함께 갔던 사람이라고 하니 반갑다며 당장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정원과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마침 생각하는 정원이 있는 한경면 저지리는 애월 집에서도 가까웠다. 그때부터 자주 놀러 가서 정원을 감상하고, 정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과거 분재예술원이 분재작품 위주로 진열한 평면적인 정원이었다면 요즘의 생각하는 정원은 입체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다. 높고 낮은 돌담과 돌탑, 제주 특유의 오름 이미지를 구현한 작은 언덕들, 인공폭포와 연못,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관람로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정문에 들어서면 관람로를 따라 환영의 정원, 영혼의 정원, 영감의 정원, 철학의 정원, 감귤의 정원, 비밀의 정원, 평화의 정원으로 이어진다. 이들 작은 정원마다 기묘한 형상의 분재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살아있는 줄기와 죽은 줄기가 함께 어울려 서로를 감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주목, 돌과 한 몸이 돼 돌을 껴안은 모습으로 자란 느릅나무, 뿌리 부분을 잘라 거꾸로 심고 접을 붙여 기른 모과나무 등 작품 하나하나마다 절묘한 자태를 보여준다. 이 분재작품들은 모두가 수십 년 동안 성 원장의 손길을 거쳐 재탄생된 보석들이다.
 
모과  주목 느릅나무 등 다양한 분재작품이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로 설치한 좌대 위에 놓여 있다.
▲ 아름다운 분재작품들 모과 주목 느릅나무 등 다양한 분재작품이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로 설치한 좌대 위에 놓여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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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도 다녀간 그곳

생각하는 정원의 아름다운 경관 못지않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곳을 방문한 저명인사의 기념사진을 모아놓은 전시실이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전 중국국가주석, 주룽지 전 총리, 리자오싱 전 외교부장 등 중국의 전·현직 장관급 인사, 중국 유수의 박물관장 미술관장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망라돼 있다. 지금까지 다녀간 중국 정관계 고위직 인사만 6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물론 중국 외에도 다양한 국가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유명 인물이 수두룩하다.

성범영 원장과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중국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중에서도 성 원장과 내가 모두 인연이 있는 판징이 총편집 이야기는 단골 화제다. 판 총편집은 나중에 베이징에서 특파원 생활을 할 때도 교류가 있었던 분이다. 2010년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만난 모든 중국인 중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갖춘 분이었다.

성 원장으로서는 판 총편집이야말로 생각하는 정원이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한 은인이 아닐 수 없다. 판 총편집이 분재예술원을 다녀간 뒤 쓴 방문기가 1995년 11월 17일 자 인민일보에 실렸고, 그 직후 한국을 방문한 장쩌민 국가주석이 제주로 와 분재예술원을 찾았다.

장 주석은 귀국 후 간부들에게 "한국 제주도에 있는 분재예술원은 일개 농부가 정부의 지원 없이 혼자서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낸 곳이다. 가서 개척정신을 배우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 원장에 의하면 장 주석의 정원 방문은 판징이 총편집이 다녀간 뒤 주석에게 보고하여 결정됐다고 한다.

이후로 성범영 원장과 그의 분재정원은 순식간에 중국에서 유명해졌다. 국가지도급 인사들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각종 언론매체마다 탐방 기사를 싣기에 이르렀다. 성범영 원장은 어느새 중국 내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중국의 각 기관이나 대학 등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성 원장은 바쁘게 중국을 드나들어야 했다.

마침내 2015년 성 원장과 그의 생각하는 정원 이야기가 중국 교과서에 실렸다. 중3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한국인의 '개척진취(開拓進取) 견인불발(堅忍不拔) 자강불식(自强不息) 정신의 상징'으로 성 원장을 그리고 있다. 중국 전역의 중학교에서 5천만 명이 넘은 학생이 성 원장의 정원 개척정신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제5단원에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성 원장을 한국 민족정신의 전범으로 평가하고 있다.
▲ 중국 중학교 3학년 "역사와 사회" 교과서 제5단원에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성 원장을 한국 민족정신의 전범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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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후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카페로 올라갔다. 오늘은 성 원장이 어떻게 연고도 없는 제주에 내려와 분재정원을 만들게 되었는지,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무작정 제주로 내려간 용인 청년

경기도 용인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부터 '나무'와 '시골'을 좋아했다. 1962년, 제대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청년 성범영은 라디오 좌담 프로를 듣게 된다. 제주도를 방문하고 돌아온 대학교수들이 출연해 한라산의 수려한 경관과 천지연 폭포의 웅장함, 사철 푸른 상록수 등등 아름다운 제주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문득 군대에서 만난 제주 출신의 친구를 떠올렸다. 틈만 나면 고향 제주도 이야기를 해준 그 친구로 인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제주도가 친근하게 느껴졌는데,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순간 그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 하루를 묵고 제주도행 연락선을 탔다. 파도에 시달린 끝에 제주항에 내리자 초겨울인데도 푸른 잎이 울창한 상록수들이 보였고 올망졸망한 돌담을 끼고 파랗게 자라는 채소들과, 처음 보는 밀감나무에 노랗게 달린 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친구가 사는 저지리는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다. 친구와 함께 제주도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제주의 이국적인 환경에 매료된 그는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곳에서 농사짓고 나무도 가꾸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돌연 떠올라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성범영은 와이셔츠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주도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1500평 정도의 밀감나무밭을 사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 그 땅을 샀다. 그가 저지리에 산 최초의 땅이었다.
 
생각하는 정원에는 분재작품 외에도 기암괴석, 연못, 폭포, 정원수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 인공폭포가 보이는 정원 풍경 생각하는 정원에는 분재작품 외에도 기암괴석, 연못, 폭포, 정원수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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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목돈이 생길 때마다 주변의 땅을 사들였다. 1965, 1966년 무렵부터는 제주에 내려와 농장 부지를 개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저지리의 농장 부지는 돌이 워낙 많은 땅이라 개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중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쇠망치로 때려서 돌을 캐내야 했다.

틈틈이 제주도 일대를 다니면서 동백나무 같은 정원수나 야자나무 묘목, 밀감나무를 사다 심고 소철 씨앗을 밭에 뿌렸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분재에 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소나무, 주목, 윤노리나무, 느릅나무 등을 사다 농장 한쪽에서 분재로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1974년 성범영은 주민등록을 아예 제주도로 옮겼다. 서울에서의 와이셔츠 사업 성공에 그다지 미련을 두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손이 갈 때마다 푸르게 변해가는 황무지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농장에는 밀감이 열리기 시작했고, 분재로 기르기 시작한 나무들을 돌보는 재미도 나날이 더해갔다.

1980년 초에는 아내도 제주로 내려왔다. 이 무렵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동안 짓고 있던 4-5천 평 규모의 밀감 농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밀감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르며 가장 유망한 농사로 여겼다. 그러나 성범영은 확장일로를 걷는 밀감 농사가 언젠가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밀감파동'을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대신 그가 좋아하는 나무만 기르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막상 밀감나무를 뽑아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서울에 잠시 올라가신 틈을 타서 밀감나무 전체를 뽑아버렸다. 제주도에서 밀감나무를 뽑아버린 최초의 사건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를 '정신 나간 놈'이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이 대목을 들으면서 이분이 대단한 결단력의 소유자임을 직감했다. 지금도 감귤나무는 제주 농가에서 '효자'로 대우받는데, 이 소중한 재산을 과감히 뽑아버렸다니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결단력이요, 추진력이 아닐 수 없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분명 남다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특히 일본인들이 극찬하는 700년 이상 된 향나무는  생각하는 정원의 보물과도 같은 나무다.
▲ 최고령 향나무 특히 일본인들이 극찬하는 700년 이상 된 향나무는 생각하는 정원의 보물과도 같은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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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부상 입으며 완성한 분재예술원

성범영은 차츰 분재를 전시할 정원을 만드는 일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분재정원을 만들 생각은 굳혔으나 전문지식도 부족했고 정원설계도도 없었다. 그러나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중에 가장 한국적이면서 제주도 분위기에 어울리는 분재정원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림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주도의 특징인 오름을 살려서 정원을 꾸미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연못 공사는 땅을 파는 데만 40여 일이 걸렸다. 큰 굴착기를 동원했는데도 워낙 돌이 많고 단단해 시간이 지체됐다. 이어서 파낸 돌을 쌓은 다음 위에다 흙을 1-2미터쯤 덮어 야트막한 동산(오름)을 만드는 공사도 진행했다. 돌과 흙을 외부에서 끝도 없이 실어와 땅 위로 쏟아 부었다.

돌담 공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원의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부는 제주의 바람을 막아주어야 한다. 얕은 돌담은 틈새가 보이도록 쌓으면 되지만, 외벽이 될 높은 돌담은 시멘트로 돌을 접착하면서 높이 쌓아 올려야 했다. 일일이 돌의 모양을 다듬고, 작업대 위에 올라가 아래서 올려주는 돌을 받아 쌓아나갔다.
 
씨앗에서부터 싹을 틔워 30여 년을  키운 해송분재
▲ 씨앗으로 키운 해송 씨앗에서부터 싹을 틔워 30여 년을 키운 해송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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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전기와 수도도 없이 공사한 기간만 8년.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성 원장은 분재정원을 만들면서 12차례나 크게 다쳤는데, 그중 수술한 경우만도 7차례나 된다. 허리에만 3개의 핀이 꽂혀 있다. 양쪽 어깨와 무릎도 수술해야 했다. 정원 조성에 몰두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두루외(미친 사람이란 뜻의 제주어) 혹은 돌챙이(石手의 제주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1992년 7월 미완성 상태에서 서둘러 분재예술원을 개원했다. 개원 15주년을 맞은 2007년에는 '생각하는 정원'으로 재탄생했다. 성범영은 돌 하나 혹은 나무 한 그루를 정원에 놓을 때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 그 나무를 놓았을 때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의 빛이 퇴색되지는 않을지, 정원 전체의 구도를 해치지는 않을지, 혹은 분재 받침대의 높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를 고민해야 하고, 더 나아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었을 때 그 나무가 변화하는 모습까지도 일일이 그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민간정원 1호'

1만8천 평 규모의 생각하는 정원에는 연간 약 30-40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그중 약 30%가 외국인인데, 특히 국빈 방문은 제주도 내에서 1위의 관광명소다. 1500여 점의 분재와 1만여 그루의 정원수를 보유한 대한민국 '민간정원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성 원장은 국빈급 인사들 이외에도 분재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들이 와서 보고는 한결같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극찬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분재작품 하나하나의 예술성은 물론, 정원수와 분재, 돌과 물 등 모든 구성 요소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조화미(調和美)를 특히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성범영 원장으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정원 개척사를 들으면서 그가 흘린 땀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또 시간의 축적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분재예술의 진수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원이 주는 감동의 9할은 눈에 보이는 작품보다 이를 만들어낸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성범영 원장(오른쪽)은 1995년 분재예술원 시절 처음으로 만났다가 제주로 이주한 후 다시 만나게 됐다.
▲ 성범영 원장과 필자 성범영 원장(오른쪽)은 1995년 분재예술원 시절 처음으로 만났다가 제주로 이주한 후 다시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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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분재 요령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배우지 말라고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분재를 돌봐줘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분재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시간과 땀과 정성을 들일 자신도 없으면서 분재의 아름다운 모습에 혹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생각하는 정원에 갈 때마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판징이 총편집과 분재예술원을 찾아간 일,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성범영 원장과 생각하는 정원이 중국에서 유명하게 된 일, 우연히 신문 인터뷰 기사를 읽게 돼 다시 그와 만나게 된 일, 이 모든 게 우연만은 아닐 성싶다. (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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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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