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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는 흔히 주어가 생략된다. 그러나 아무데서나 주어가 생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에서는 흔히 주어가 생략된다. 그러나 아무데서나 주어가 생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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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어는 없었습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 중에 당시 한나라당의 나경원 대변인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뇌었다는 그 '불후'의 논평이다. 이 논평은 정치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 국어 문법을 불러낸 흔치 않은 사례로 사람들의 입길에 널리 오르내렸다. 

그해 대선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명박 후보는 그 회사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줄곧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 직전에 결정적인 증거, 그가 "BBK라는 금융 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발언한 동영상이 공개되었고, 문제의 논평은 이때 나온 것이었다.

"요즘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 금융 회사를 창립을 했습니다. 금년 1월달에 BBK라는 금융 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 -이명박, 2000년 10월 17일 광운대 강연에서 

이명박 후보가 한 발언을 살펴보면, 앞 문장은 주어 '제가'를 썼고, 뒤 문장에서는 생략했다. 그러나 맥락상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주어가 없으므로 책임도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논평이 대중의 비난을 받은 이유다. 

영어와 달리 우리말에는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담화(대화) 상황에서는 화자는 물론, 청자도 주어 없이 대화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나 연인이 서로의 내밀한 감정을 고백하는 대화에서 뻔히 알 수 있는 문장성분은 얼마든지 생략될 수 있다. 

"어디 가?"(주어 '너' 생략) / "응, 도서관에."(주어 '나'와 서술어 '간다' 생략)
"사랑해."(주어 '나', 목적어 '너' 생략) / "나도."(목적어 '너', 서술어 '사랑해' 생략)


그러나 대체로 문장에서 주어는 함부로 생략할 수 없다. 주어는 서술어, 목적어, 보어와 함께 문장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성분, 즉 '필수성분'이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주어가 분명하게 파악이 되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때에는 주어도 생략할 수 있다. 

주어의 부당한 생략

 
주어의 부당한 생략
 주어의 부당한 생략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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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와 서술어는 문장을 이루는 가장 핵심 요소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호응(呼應, 앞에 어떤 말이 오면 거기에 응하는 말이 따라옴. 또는 그런 일.)에 문제가 생겨서 비문(非文, 문법에 어긋난 문장)이 된다. 생략하면 안 되는 문장에 주어를 부당하게 생략하는 예는 주로 홑문장(주어와 서술어가 각각 하나씩인 문장)이 아닌 겹문장(두 개 이상의 주술 관계가 있는 문장)에서 볼 수 있다. 

겹문장이라도 주어를 공유할 경우, 즉 같은 주어로 이루어진 문장일 때는 주어 하나를 생략할 수 있다. 문장 "그는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였다"는 '그는 대학에 갔다'와 '그는 문학을 공부하였다'는 문장이 이어진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는 뒤 문장의 주어를 생략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1) 본격적인 공사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개통될지 모른다. 
(2) 문학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보여 주는 예술의 장르로써 문학을 즐길 예술적 본능을 지닌다. 


문장 (1)은 세 개의 정보(문장)로 구성되었다. ① '공사 시작'과 ② '(도로) 개통', 그리고 ③ 주체가 앞의 사실을 모른다는 것 등이다. 이 문장을 분석하면 문장 ①과 문장 ②가 이어져서 ③ 문장의 목적어가 된다.

(1)-1 본격적인 공사가 언제 시작된다. 
(1)-2 (○○)이 언제 개통된다.
(1)-3 (○○)는 (위 사실)을 모른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를 살펴보자. (1)-1의 '공사'와 '시작되다'는 주술 관계다. (1)-2의 '개통되다'는 서술어인데 주어는 앞의 '공사'가 아니다. 개통되는 것은 '도로'거나 '다리'가 될 것이니 주어(도로, 다리)가 생략됐다. 주어를 공유하는 문장이 아니어서 이 주어는 생략할 수 없으니, 이는 '부당한 생략'이다.

(1)-3의 서술어 '모른다'도 주어가 생략되었다. 생략된 주어는 '나', 혹은 '사람들은'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 주어는 생략되어도 문장 구조를 해치지 않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 

문장 (2)도 '문학은 ~장르다'와 '(  )이 ~본능을 지닌다'라는 두 개의 정보로 구성됐다. 분석하면 다음 두 문장이 연결된 이어진 문장이다. 
 
주어의 부당한 생략
 주어의 부당한 생략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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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문학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보여 주는 예술의 장르다.
(2)-2 (○○)은 문학을 즐길 예술적 본능을 지닌다.


(2)-1의 주어는 '문학', 서술어는 '장르'다. (2)-2에서는 '지닌다'가 서술어지만, 그 주체가 무엇인지 드러나 있지 않다. 앞의 주어 '문학'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문학이 주어가 될 수 없으므로) 생략할 수 없는 주어가 생략되었다. '인간'으로 추정되는 '주어'가 생략된 것인데, 이 역시 '부당한 생략'이다. 

다음 문장들도 모두 '주어'를 '부당하게 생략'한 예다. 주어와 서술어를 찾아 두 성분이 서로 호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부당한 생략 여부를 알 수 있다. (정답은 덧붙이는 글에)
  
(3) 우리가 한글과 세계의 여러 문자를 비교해 볼 때, 매우 조직적이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라고 하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4) 영수는 은희에게 가방을 주었는데, 그 보답으로 영수에게 책을 선물하였다. 
(5) 지난번 폭우로 피해를 본 수재민들에게 겨울철 이전에 주택 복구를 위해 1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키로 했습니다.
(6) 그러나 다행한 것은, 그의 불타는 창작 의욕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 내었으며, 인류를 위해 훌륭히 예술을 창작할 것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답 : ( ) 안이 생략한 주어임
(3) (한글이) 매우~
(4) (은희는) 그 보답으로
(5) (정부는) 겨울철 이전에
(6) (그가) 인류를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태그:#주어의 부당한 생략, #'주어 없다'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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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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