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표류한 인물을 통해 사람의 생존 의지를 다루고 있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는 주제와 내용에 걸맞게 주인공 척의 고난을 관객에게 생생히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 38분 쯤을 보면 유독 동화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마지막 탈출 시도라 생각하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간 척의 앞에 고래가 몸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 척이 겪은 역경을 생각하면 그즈음엔 상어가 등장해서 그를 극한의 위기까지 몰아붙여야 더 어울린다. 왜 고래였을까? 거기다 이 고래는 굳이 물 밖으로 나와 척과 눈을 맞추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고래의 등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체력이 바닥난 척이 뗏목 위에서 잠들어 있을 때 그의 유일한 동료인 윌슨(배구공이다)을 고정해놓은 줄이 풀려서 윌슨이 떠내려가게 되는데, 그 순간 척이 별안간 물벼락을 맞고 깨어난다. 덕분에 척은 윌슨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그를 구하러 물에 뛰어든다. 이어지는 장면을 더 살펴보자. 또다시 정신을 놓은 척이 뗏목 위에 쓰러져 있는데 바로 옆에 큰 화물선이 지나간다. 관객은 당연히 어서 척이 눈을 떠서 구조되기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때 또 한 번 물벼락이 떨어진다. 그제야 척은 정신을 차리고 화물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 장면에서 등장한 물벼락의 주인은 당연히 고래이다. 실제로 몸이 등장하진 않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러니까 고래는 척을 발견한 밤부터 쭉 그를 따라다니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영화의 말미, 그것도 결정적인 구조 순간에 고래의 선의가 삽입된 이유가 뭘까?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조난한 척이 지난 4년간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먼저 척이 사고를 당한 시점으로 이동해보자. 일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미처 즐기지 못하고 급하게 떠나야 했던 그는 연인인 켈리로부터 회중시계를 선물로 받는다. 회중시계 안에는 켈리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척이 켈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이미 영화 초반부에 충분히 표현되었기에 회중시계가 척에게 무척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쯤은 관객 모두가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척이 그것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척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폭발로 인해 추락할 때, 척은 구명조끼와 회중시계가 각각 반대쪽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구명조끼를 챙기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척이 안전띠를 푸는 위험을 무릅쓰고 선택한 것은 회중시계였다. 그리고 그 회중시계는 척이 무려 4년이나 무인도에서 생활할 동안 그의 귀중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사실상 회중시계가 구명조끼 이상의 역할을 해낸 셈이다.
 
 〈캐스트 어웨이〉스틸컷

〈캐스트 어웨이〉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이처럼 척은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일상에서 지켜온 소중한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인도에 떠밀려온 척은 정신을 차린 후 망연히 바다만 바라보는데, 비행기에 실려 있던 택배가 파도에 떠밀려오는 것을 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섬을 둘러본다. 어딘지도 모르는 섬에 조난했는데 그깟 택배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잘 챙겨서 한곳에 모아둔다. 다음 날에 또 몇 개의 택배가 떠밀려오자 역시 똑같이 행동한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곧바로 택배 상자를 뜯어 안에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볼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에게 택배는 고객에게 배달해야 할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하려다 실패한 척은 다리에 큰 상처를 입게 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택배 상자를 하나씩 열어본다.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칼 대용으로 쓸 수 있는 피겨스케이트 신발과, 그물로 쓸 수 있는 망사가 달린 원피스가 나왔으니까. 그런데 척은 마지막 한 개의 택배만은 열어보지 않는다. 포장을 뜯으려다가 상자에 그려진 날개 그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보던 그는 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느끼기라도 한 듯 열어보기를 관둔다. 시간이 지나 구조되고 나서 그는 그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며 이런 쪽지를 남긴다. '이 소포가 제 생명을 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척 놀랜드.'

이 소포의 주인은 사실 척보다 먼저 이 영화에 등장한다. 소포에 그려진 날개와 같은 모양의 조각을 하고 있던 여자의 집에 페덱스 기사가 찾아오고, 기사는 그녀가 챙겨놓은 소포를 챙겨 배송차에 싣는다. 여기서 카메라는 독특한 시점을 따른다. 바로 소포의 시점이다. 이 시점은 소포가 여자의 남편에게 도착하면서 끝난다.

무생물에 시점을 부여해서 여정을 보여준 부분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다. 이러한 변칙을 사용한 까닭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소포를 척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척이 택배기사들에게 한 연설을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 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척은 택배를 최단 시간 배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기 위해 타이머가 든 택배를 자기 자신에게 부친다. 기사들 앞에서 도착한 택배를 열어보니 타이머는 87시간 22분 17초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87시간 걸린 건 영원히 안 온 것과 같'다며 '87시간이면 전쟁도 나고 나라도 망했어요!'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오래 걸려 돌아오면 안 온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은 그가 4년이 지나 구조되었을 때 켈리가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린 것으로 밝혀지는 부분과 연결된다. 그렇게 고대하던 연인과의 재회가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자기가 보낸 소포가 기대치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것을 확인하는 초반부의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내용, 척이 상상도 못 하게 오랜 시간 섬에 갇혀 지내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격이다.

그렇다고 척이 켈리를 생각하며 버틴 지난 4년이 허무해지는가? 절대 아니다. 그가 회중시계 속 켈리의 사진을 보며, 동굴 벽에 켈리의 그림을 그리며 버틴 나날들이 몇이었던가. 어떻게 그가 감내해 온 시간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척의 마음속에 켈리라는 소중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그 자체이다. 다만 켈리의 역할은 그게 다였을 뿐이다. 마치 척이 화물선을 발견하기 바로 전 그에게서 멀어진 윌슨처럼, 켈리도 제 몫을 다하고 척의 인생에서 멀어졌다.
 
 〈캐스트 어웨이〉스틸컷

〈캐스트 어웨이〉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척이 고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아니 우연이라 할지라도 그가 만들어낸 우연이라고 감히 단정할 수 있다. 그 장면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차라리 척이 절망 속에서도 살기로 한 결심 그 자체가 더 기적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기적이란 갑자기 고래가 등장해서 그를 돕는 상황이 아니라, 고래를 만날 수 있는 그곳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척의 의지를 가리킨다.

영화의 말미에서 척은 고백한다. 사실 섬에서 죽으려고 목을 맸다고. 하지만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살아남았다고. 그다음 그는 따뜻한 담요 같은 느낌이 덮이는 것을 느꼈고 이유는 모르지만 계속 숨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논리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결국 그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의 논리는 틀렸음이 밝혀졌다.

우리는 종종 논리적으로 가능성을 찾을 수 없으면 절망하고 무작정 기적을 바란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듯 희망은 논리 너머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이성을 활용해서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의심하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종종 추악하고 비겁한 것으로 그려지는 세상이다. 그러니 생존 의지가 얼마나 결연하고 숭고한 마음인지를 보여주는 〈캐스트 어웨이〉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날 것이다.
영화리뷰 영화추천 드라마 모험 조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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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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