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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마산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터 표지판을 찾은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오른쪽).
 창원마산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터 표지판을 찾은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오른쪽).
ⓒ 열린사회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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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항일전선에서 활약해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던 김명시(金命時, 1907~1949)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 재심'이 신청되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대표 백남해)는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재심신청서를 냈다고 23일 밝혔다. 이 단체는 2019년 1월 포상신청했고,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 11월 '포상 제외 결정 통지'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국가보훈처의 '포상 제외 결정 사유'를 분석해 '보완'하거나 '반박'해 다시 재심을 요청했다. 국가보훈처는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등의 사유를 들어 포상할 수 없다고 했다.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되어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공맹'을 조직했으며,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이후 김명시 장군은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복역했고, 1939년 출옥한 뒤 중국으로 탈출하여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에서 항일투쟁했다.

또 김명시 장군은 1942년 조선의용군 제1선적구부대 임무를 수행했고, 적구여자부대 지휘관으로 텐진, 베이징 등에서 항일전을 전개했다. 한 손에는 총,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다.

"북로당 정치위원 때문이라 짐작"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국가보훈처가 "사망경위 등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이라고 한 것에 대해, "2018년 변경된 독립유공자 심사 기준에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한 경우가 아니면 사안별로 판단해 포상을 검토'하도록 한 것과는 사뭇 달라 매우 안타까웠다"고 했다.

이 단체는 "심사 결과 공문을 받고 보훈처 담당자와의 통화를 통해 포상에서 제외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김명시 장군의 직책이 '북로당 정치위원' 때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명시 장군의 사망과 관련해, 이 단체는 "1949년 10월 10일,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한 김명시 사건을 내무부장관(김효석)이 직접 나서서 김명시는 '북로당 정치위원'이며, 유치장 수도관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며 "관계 당국은 '북로당 정치위원'을 상당히 서열이 높은 고위직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국토통일원에서 펴낸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자료집>(1988년)에 보면 김명시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들어 있지는 않다.

이 단체는 "북로당은 1946년 8월 28~30일까지 평양에서 창립대회를 개최되었고, 이때 선출된 중앙위원은 김두봉, 김일성, 최창익, 허정숙 등 모두 43명이었으며, 감찰위원이 11명이었다"며 "김명시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정치위원회'라는 조직기구도 없다"고 했다.

이어 "북로당 2차 대회는 1948년 3월 27일~4월 3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김두봉, 김일성 등 모두 67명의 중앙위원과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20명과 중앙 검사위원 7명이 선출되었다. 이때에도 역시 정치위원회도 없고 김명시 이름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당시 남한에 존재했던 좌파 정당의 당원이나 수많은 좌익 활동가들 중 김명시 장군처럼 정치위원이라는 직위를 가진 활동가를 찾아보기 힘든다"며 "따라서 당국에서 발표한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용어 자체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토통일원이 1988년 펴낸 <조선노동당대회 자료집>에 보면, '중앙위원' 명단에 김명시가 없다.
 국토통일원이 1988년 펴낸 <조선노동당대회 자료집>에 보면, "중앙위원" 명단에 김명시가 없다.
ⓒ 열린사회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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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 장군 사망과 관련해, 이 단체는 "부천경찰서 김명시 사망 사건에 책임 있는 관계 당국의 입장에서는 김명시가 북로당의 거물급 인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만큼 숨겨야 할 것이 많아 자살했을 것이라는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했다.

"김명시 장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했느냐"에 대해, 이 단체는 "북에는 '신미리애국열사릉'이라는 곳이 있다. 북 정부 수립에 공훈이 인정된 사람들을 안장한 국립묘지다"고 했다.

이어 "이 능에는 김명시와 같은 시기 남쪽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활동가들이 여럿 있지만, 거기에 김명시는 없다"며 "북의 정권수립에 대한 기여도는 북이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김명시를 북의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고 단정하여 서훈심사에서 제외시켰다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에 대해, 이 단체는 "너무 모호한 표현"이라며 "해방 이후 서울로 들어온 김명시는 1945년 12월 조직된 여성대중조직인 '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에 선출되었고 몇 차례의 공개집회에서 강사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1946년 2월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4월에 서울지부 의장단에 선출, 1946년 12월에 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을 맡게 된다"며 "1946년 역시 합법적인 공개 집회에서 몇 차례 연사로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단체는 "김명시의 공개적인 활동은 1947년 6월 29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인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군정청을 방문해 하지 중장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했고, 여기까지 김명시는 합법적이고 공개된 활동으로 행적이 분명하다"며 "그러나 이날을 끝으로 그는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김명시 장군은 1949년 10월 10일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하기까지 2년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어디에서 누구와 무슨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밝혀진 게 없다.

이와 관련해 이 단체는 "분명한 것은 김명시가 잠적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고 해서 막연히 '북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그 이유는 북한에서 지금까지 김명시를 챙기지 않는다는 사실만 보아도 북한 정권 수립에 높이 평가받을 만한 어떤 행위가 없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명시 장군이 부천경찰서에 피검된 것은 1947년 10월 13일 경찰이 발표했던 '8·15 폭동음모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좌익계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잡혔고, 김명시 장군은 '기소중지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이 단체는 "당시 사건은 말 그대로 음모 사건으로 실행이 된 것도 아니었고 경찰 총장의 발표한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려운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며 "김명시가 선전위원으로 활동한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이었던 정칠성은 북으로 올라갔고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지만, 김명시는 끝내 북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사망경위가 불분명하다는 것도 포상에서 제외된 사유로 적시 한 부분이다"며 "사실 이 시점에서 그의 죽음이 고문치사인지 자살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고 했다.

이어 "당시 관계 당국의 주장대로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제 앞잡이였던 '친일경찰'들에게 고문을 받는 것에 치욕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단체는 "어느 쪽이건 그날로 그는 생을 마감했고, 더 이상 남과 북 어디에도 영향을 미칠 행위는 할 수 없었다"며 "이 시점에서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 없는 사망경위가 서훈심사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분명한 사실은 김명시가 일제강점기 여성의 몸으로 일본군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운 항일독립운동가라는 것"이라며 "그런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해방공간에서 극단적인 좌우 대립으로 허망한 죽음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고 했다.

이어 "이는 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 한 부분을 칼로 도려내는 일이다"고 덧붙였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국가보훈처는 재심을 통해 김명시 장군의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부분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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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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