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닉스 포스터

영화 피닉스 포스터 ⓒ 엠엔엠인터내셔널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_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전후 독일 연작, 그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제목처럼 모든 전쟁은 여자와 소수자들에게 적대적이다. 지각 개봉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2014년 영화 <피닉스> 또한 기본적인 정서를 공유한다. 감독은 독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단선적으로 정의내리기 쉽지 않은 쟁점들을 복잡 미묘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로 풀어내는 작업들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감독의 연출작 중에서 <피닉스>는 동서독 분단 문제를 담은 2012년 작품 <바바라>와 현재 유럽 난민 문제와 2차 대전 당시를 정교하게 연결한 2018년 작품 <트랜짓> 사이에 위치한다. 후속작보다 좀 늦게 도착한 <피닉스>는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주인공의 정체성문 제로 연동시킨 또 다른 야심작이다.
 
<피닉스>는 주인공과 그녀를 배신한 남편과의 애증이 교차하는 가운데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로 인한 상흔과 전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 건설을 모색하던 시기의 쟁점을 영리하게 씨줄 날줄로 교차시켜 복잡다단한 묘사로 확장시켜내는 재주가 탁월한 작품이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될 관객은 주인공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확장해서 해석하고 그 의미를 추론하는 지적 유희에 참여하게 된다.

영화를 복잡한 치정극으로 보건, 고도의 은유로 묘사된 독일과 이스라엘의 전후와 형성 과정의 역사극으로 보건 그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전자거나 후자거나 간에 두 관점은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듭하며 혼합될 수밖에 없다. 그 정도에 따라 <피닉스>의 색깔과 표정은 다른 결을 띠게 될 테다. 하지만 강렬한 붉은 톤을 크게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라면 대다수가 동의하리라 믿는다.
 
2_<피닉스>가 그려낸 정체성 혼란 : 나는 누구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베를린, 강제수용소에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친구 레네의 도움으로 '재건' 수준의 성형수술을 마친 넬리가 돌아온다. 레네는 전쟁의 참화를 잊고 함께 유대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한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것을 넬리에게 제안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체포되면서 헤어지게 된 남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레네는 넬리에게 숨겨둔 비밀이 있었다. 그래서 넬리가 남편을 찾으려는 행동을 애써 만류하지만 넬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집착은 성형수술로 얼굴이 바뀌고 지인들 대부분을 전쟁 통에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발로일 것이다. 집요하게 그를 찾던 중 주둔 미군들을 상대하는 클럽 '피닉스'에서 마침내 그녀는 남편 조니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름조차 바꾼 그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제 그녀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픈 집착과 함께, 레네가 알려준 남편의 비밀에 대해 확인하고자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넬리는 자신이 진짜임에도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한다. 전쟁 전 행복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픈 집착을 그녀는 필사적으로 좇기 시작한다. 그녀가 알던 거의 모든 이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휘말려 죽었고, 일부는 알고 보니 자신을 팔아넘기거나 배신하는데 일조한 상황. 천신만고 끝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왔음에도 남편조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이다. 자신이 진짜 넬리가 맞는데도 오히려 대역을 자처해야 비슷해 보인다는 소릴 듣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그녀의 혼란을 부추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취해야 할 답을 정하지 않은 채 게임을 시작한다. 가짜로서 진짜를 연기하기로. 관객은 진실을 알지만 화면 속에선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누구도 그 상황을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피닉스>의 연출은 관객과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꽤 멀다. 관객은 마지막 그녀의 선택만을 알지 못할 뿐 '나라면 어떻게 할까?' 판단을 요구받거나, 혹은 스스로 자문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게 될 테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이다.
 
 영화 피닉스의 한 장면.

영화 피닉스의 한 장면. ⓒ 엠엔앰인터내셔널

 
3_전후 '세기말 베를린'의 풍경 : 돌이킬 수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반기 대작, <카게무샤> 주인공은 영주 다케다 신겐의 때 이른 죽음을 라이벌 영주들에게 감추기 위한 '카게무샤', 그림자 무사 역할을 떠맡은 좀도둑이다. 그는 그저 외모가 닮았을 뿐인 신겐의 대역을 처음엔 사례 때문에, 이후에는 영주와 그를 중심으로 조성된 완벽한 소우주에 대한 동경심에 이끌려 스스로 원래의 자아를 버리고 대역에 몰입하며 자신을 다케다 신겐과 동일시하게 된다.
 
<피닉스>에서의 넬리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목숨만 겨우 건져서 돌아왔지만 그 대가로 얼굴을 잃어 버렸다. 그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돕는 친구 레네 외에는 누구도 그녀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심지어 남편조차도. 그런 상황에서 넬리는 자신을 주장해도 온전히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남편 조니 앞에서 '에스더'라는 다른 인물로 자처하는 순간부터 아내 넬리와 비슷해 뵌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이제 넬리는 에스더를 연기함으로서 조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녀는 에스더 역할을 맡으면서 조니의 계획에 파트너로 동참하게 된다. 넬리의 행세를 해내기 위해 부부의 기억을 복원하는 연습을 수행하면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조니는 에스더란 여인이 기가 막히게 넬리의 필체를 흉내 내거나 '생전의' 넬리가 입던 옷과 화장을 재현하는 걸 겪으며 순간 혼란에 빠져들곤 한다. 넬리는 재현을 위한 훈련 과정이 이미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부부의 보금자리로 돌아간 듯 몽환적인 감정으로 다가온다. 친구 레네는 전쟁으로 모든 게 파괴된 현실을 직시하라며 넬리를 만류하지만 그녀는 계속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초반에 넬리가 겨우 수술을 마치자마자 찾아간 과거 그녀의 집은 전쟁 과정에서 벽돌 더미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감독은 그 폐허 묘사를 통해서 이미 넬리의 꿈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정지어버린다. 친구 레네는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그녀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거듭 충고하는 현명한 예언자이지만, 본시 예언자의 숙명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데 있게 마련이다. 레네는 자신들의 민족 자체를 '최종 해결(나치의 유태인 절멸 정책)'하려 한 독일은 물론 유럽 땅에서 유태인이 설 자리는 없다고 단정한다. 레네 역시 거의 모든 피붙이와 친구들을 전쟁 과정에서 잃었을 게 뻔하다.

극단적 시오니즘은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에서 태동해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로 그 정당성을 획득해 버렸다.(그리고 귀환한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것을 고스란히 가해자로 되갚게 된다) 레네 또한 삶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방향을 잃어버린 채 친구 넬리와의 관계를 (내색하진 않지만) 동아줄처럼 여기고 있었던 게다.
 
파괴된 집터를 확인한 후, 넬리는 베를린에 주둔한 미군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클럽 '피닉스'에서 우연히 남편 조니와 재회한다. 베를린은 1차 대전의 상흔에서 회복된 1920년대 말부터 지식인과 예술가, 소수자들이 몰려들어 전위적 문화의 중심지였고, 도발적 공연을 펼치던 카바레가 융성하던 곳이었다. 이제 그 잔재에 점령군인 미국의 대중문화가 결합된 기묘한 풍경이 가득한 그곳에서 재회한 과거 부부의 풍경은 역사적 배경과 두 남녀의 돌이킬 수 없지만 그림자는 가득 남은 감성을 교차시킨다.
 
이후 외줄타기처럼 연이어 전개되는 넬리의 에스더로서의 남편 조니와 함께 하는 시간들은 감독의 정교한 연출과 구성으로 팽팽한 긴장을 마지막까지 이어나간다. 거의 모든 정보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영화 초반부터 공개하고 있음에도 넬리의 감정이 요동치는 수차례의 변곡점들은 그녀의 사소한 신체 동작과 태도, 화장과 의상의 작은 변화들 같은 소소한 것들로 차곡차곡 섬세하게 묘사된다. 자칫 늘어지거나 피곤해질 법한 중반부를 전쟁이라는 파국적 상황이 낳은 기구한 현실 설정으로 풍부하게 채워내 빈틈을 보이지 않는 노련한 경지를 선보인다.
 
 영화 피닉스의 한 장면.

영화 피닉스의 한 장면. ⓒ 엠엔엠인터내셔널

 
4_극단의 시대, 개인(들)의 상상 초월 다양한 경우
 

홀로코스트가 끝나고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집단적으로 그 지옥 같던 시간을 애써 잊거나, 억지로 용서(하는 척) 하거나 상징적인 지점만 머릿속에 남기려 생의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시도하게 된다. 영화 곳곳에서 넬리는 전쟁 전 행복했던 향수와 전쟁 중의 악몽 같던, 하지만 분명히 그녀가 겪었던 실제와의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런 개인의 감정 선과 함께, 친구 레네가 그녀에게 주지시키려 애쓰던 시대적 상황은, 넬리 역 니나 호스와 조니 역 로날드 제르펠드, (전작 <바바라>에서부터 호흡을 맞춰온) 두 주연배우의 강렬한 연기가 음악과 어우러져 빛나는 순간, 너무나 인상적인 결말부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결말에 대한 해석은 몇 갈래로 나뉠 듯하다. 감독은 천편일률적인 복수극으로나, 억지 신파의 화해 극으로나 단선적인 마무리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 대신에 관객 스스로가 주인공 넬리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취할 것인가 끊임없이 반문하게 만들고, 그 결론에 따라 그녀의 마지막 표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방식을 취한다. 각자가 선택한 결론 해석에 따라 주인공 캐릭터의 태도에 대한 논란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필자로서는) 감독이 줄기차게 소재와 배경으로 삼아온 격동의 독일 근현대사와 그런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결코 스테레오 타입으로 단선화 된 유형이 아닌, 흔들리는 갈대처럼 복잡성을 띨 수밖에 없는 개인 군상들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결론에 넬리가 도달한 것으로 판단하는 입장이다.
 
다만 그 선택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좋았던 옛 시절, 전쟁 이전의 평화롭고 안락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집착하는 감정들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기억일까에 대해,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함부로 재단하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격언이 있다. 육체적 생명은 부지했으되, 인간 이성이 유래가 없을 만큼 효율적으로 같은 인간을 대량으로 도살하는 데 활용되었던 시간. 겨우 살아남았지만 온당한 복수도 제대로 된 치유도 불가능했던 전후의 혼란상. 정쟁의 도구로서 600만이 학살을 당했네 아니네 하는 식의 상징화된 수치로 가둬진 제노사이드의 정치학만이 남은 채 개인이 개별적으로 겪어야 했던 구체적 참상은 뒷전으로 소외되어갔던 역사의 흔적. 그런 복잡성을 이만큼 유려하게 표현하는 엔딩은 쉽게 볼 수 없을 인상적 장면이다.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미증유의 제노사이드. 그런 극단의 시대에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상황들이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등장하게 마련이다. <피닉스>는 그런 가정을 지독히 영리하게 잘 활용해 보는 이들의 기억과 감정에 작지만 예리한 쐐기를 깊숙이 박는 영화다.
 
<작품정보>
피닉스 Phoenix
2014|독일|멜로, 드라마, 역사
2021. 7. 22. 개봉|98분|12세 관람가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주연 니나 호스, 로날드 제르펠드
출연 니나 쿤젠도르프, 미하엘 메르텐스, 이모젠 코게, 커스틴 블록 외
수입 / 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14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
2015 미국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 톱5
2015 독일영화상 여우조연상(니나 쿤젠도르프)
2015 시애틀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니나 호스)
2015 홍콩국제영화제 SIGNIS상 특별언급
피닉스 크리스티안 페촐트 엠앤엠 인터내셔널 니나 호스 로날드 제르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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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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