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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좌익 전향자 등을 집단 예비검속했다.
 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좌익 전향자 등을 집단 예비검속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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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물 갖다 부어라." "예, 아버지." 아버지 조백현이 대형 가마솥에 바닷물을  부으라고 하자 아들 조재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조재관은 집안 머슴들과 함께 물지게에 물동이를 걸고 바닷물을 나르느라 땀범벅이었다. 가마솥에는 물이 한정 없이 들어갔다. 가마솥이 폭 4미터에 높이가 2미터나 돼 열 명 넘게 머슴이 동원됐지만 만만치 않게 시간이 걸렸다. 20대 중반의 조재관은 얼마 전 첫째 아들 조용호가 태어난 터라 더 열심히 일했다. 

가마솥에 바닷물을 가득 붓고는 준비한 장작에 불을 지폈다. 바닷물이 끓자 소금이 가마솥 바닥에 가라앉았다. 이렇게 해서 소금을 만드는 방식을 '자염(煮鹽)'이라 한다. 이 자염 방식은 1950년 충남 태안군 이북면(현 태안군 이원면) 사람들에게 낯설기만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 천일염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천일염은 일정한 공간에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햇볕과 바람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얻는 소금을 말한다.

태안군 이북면에서 자염을 처음 만들고 판매한 이가 바로 이북면 포지리의 조백현이었다. 당시에는 '조백현의 땅을 밟지 않고는 포지리를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땅은 저수지 물을 끌어올 수 없는 천수답(天水畓)이어서 소출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조백현은 소금 생산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집안 머슴들과 자염을 만들던 조재관이 어느 날 마을에서 보이지 않았다. "조백현 영감 아들이 요 며칠 안 보여?" "의용군에 나갔다던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은 기세좋게 내려왔지만 전선은 낙동강에서 고착화되었다. 그러자 인민군은 의용군 모집에 공을 들였다. 북한 정규군만으로는 화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민군이 점령해있던 태안군 이북면 포지리에 살던 조재관도 의용군으로 전선에 끌려갔다. 

소고기 한 점 값이 사람 목숨?

그런데 얼마 후 의용군에 갔다던 조재관이 물지게를 지고 식전에 마을 어귀에 나타난 게 아닌가. 같은 마을 김진수(가명)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어떻게 된 겨? 자네 의용군에 끌려 갔다던디!" "야. 가다가 도망 왔어유."

조재관은 미군 폭격에 무리가 우왕좌왕하는 틈에 대열에서 도망쳤고 무사히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다. 탈출담을 들은 김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그렇게 된 거구만"하고 대꾸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학생을 포함한 청년 일부가 의용군에 자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 8월 말 전선이 고착화되자 의용군 모집은 쉽지 않았다. 결국 의용군 모집은 할당제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조재관도 의용군에 차출되었다. 자발성이 결여된 의용군에 사기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불똥이 튀었다.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하기 며칠 전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소를 잡아먹고 있었는데 조재관이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리 와서 고기 한 점 먹고 가게"라는 말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해서 지방 좌익들이 우익 인사의 소를 강취해 잡아먹던 자리에 조재관은 우연히 끼게 됐다. 고기 한 점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줄은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군경은 수복했고 태안 지역 치안대가 조재관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는 면소재지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경 이북면 소재지 인근의 사천골에서 학살됐다. 당시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됐던 조용호는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다. 조재관이 부역 혐의로 학살된 데에는 의용군 전력이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접적 요인은 마을 지방좌익들이 소를 잡아먹는 자리에 동석한 때문으로 보인다. 

반공포로도 감시대상
 
의용군 입대 후 월북한 가족에 대한 관찰보호자카드
 의용군 입대 후 월북한 가족에 대한 관찰보호자카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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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관처럼 한국전쟁 때 의용군에 갔다가 탈출했거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반공포로로 석방되거나, 북한을 선택한 이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의용군에서 탈출하거나 반공포로로 석방된 이들은 1980년대까지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의용군 입대 후 월북한 이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본명에 대하여 망원(望遠) 및 직접, 간접으로 동향을 내사한 바 가족 및 재산이 증감된 사실(이) 없고 장기 출타 사실 없이 농사일을 거들 뿐이며, 본명의 자 김〇〇은 중장비(부로도자-불도저)를 구입하려 했으나 자금 문제로 구입을 포기하고 새마을 지도자로 일하고 있으나 소극적이며 외래자 접선 및 불온 서신 래왕 사실 없으며 야간 북괴방송 청취 사실 없이(하략)" - 1978년 3월 13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 산이리 김칠수(가명)는 의용군에 입대 후 월북했다. 이후 김칠수의 가족은 관찰대상이 되었다.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로 영동경찰서가 행한 일이었다. 

김칠수의 아내와 자녀, 며느리도 모두 감시대상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꼴로 감시 일지가 작성됐으며, 가옥 평면도와 마을 약도도 그렸다. 만에 하나 상황에 대비해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마을 약도까지 그렸는데 김칠수가 간첩으로 남파돼 가족을 접선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의용군 입대 후 월북한 자의 마을 약도
 의용군 입대 후 월북한 자의 마을 약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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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역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이충호(가명)가 그런 경우다. 이충호는 황해도 안악군 출신으로 해방 후 남하한 목사였다. 이후 그는 의용군에 차출됐는데 교전 중 체포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구금됐다. 1953년 6월 18일 반공(反共)포로 석방 때 그는 영동군 매곡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목사이면서 반공주의자였지만 의용군에 한 번 갔었다는 이유로 수년간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같은 의용군 감시는 비단 충북 영동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의용군에 자원 입대를 했던 끌려갔던 그 동기와 과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반공포로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경찰의 눈에는 의용군에 한 번 갔던 이는 무조건 빨갱이였다.

백일도 안 돼 아버지 잃고...

조용호가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돼 아버지 조재관은 사천골에서 학살됐다. 어머니는 용호가 일곱 살 되던 해에 개가했다. 천애고아가 된 그는 친척 집을 떠돌았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책 3장을 넘기고 공부를 작파했다. 얹혀 살던 작은아버지 집이 파산했기 때문이다. 

소년 조용호는 어찌어찌 하다가 인천으로 올라갔고 친척 아저씨 집에서 살게 됐다. "너 구구단 외냐?" "못해요." 순간 유리 재떨이가 조용호의 머리에 날아왔다. 이어 집안 아저씨의 손바닥이 그의 귀뺨을 강타했다. "웅"하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막이 터진 것이다.

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치유되었지만, 그의 삶은 펴지지 않았다. 꿀꿀이죽, 술지게미, 풀을 섞은 밀가루죽이 그의 주식이었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어떻게 하면 고아원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도시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소년은 10살에 고향인 태안으로 내려왔다. 11세 때부터 남의 집 머슴을 했는데 1년 새경(급여)이 쌀 5말, 보리 5말이었다.

그가 종일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술지게미 기운 덕이었다. 조용호가 어린 나이에 남의 집 머슴을 해서 모은 5년간의 새경을 날리고 말았다. 집안 아저씨가 집을 산다며 빌려 가놓고는 갚지를 않았다. 그는 홧김에 아저씨 집 헛간에 불을 질렀다. 그 길로 다시 인천행 버스를 탔다.

술집 '보이'부터 전기 기술자까지

인천에서 그는 '청양원'이라는 술집의 '보이'(술 심부름꾼)로 취직했다. 월급과 팁을 고스란히 한일은행에 저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트남전쟁에 갔다 온 또다른 집안 아저씨가 술집을 같이 차리자고 설득했다. 끈질긴 설득에 조용호는 3년 동안 모은 23만원을 전부 내놓았다. 하지만 시작한 지 3년 만인 1972년에 술집은 문을 닫았다. 아저씨는 야반도주했고, 조용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후 조용호는 전기 기술을 익혀 미도파백화점 전기공으로 입사했다. 이후 대한전선과 신성공업에서 일했다. 1975년에 신성공업이 당인리~청와대간 승압공사를 하는데, 조용호가 신원조회에 걸렸다. 다행히도 중앙정보부 감찰부장으로 있던 집안 사람 연줄로 신원조회 문제를 해결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갈 때도 회사가 신원보증을 서서 신원조회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해서 사우디아라비아, 필리핀, 예멘,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했다.

조용호(1950년생,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는 그가 선택하지 않은 일로 인생을 좌우당하며 살았다. 세상에 나온 지 백일도 안 돼 아버지가 학살되고, 7세에 어머니가 개가했다. 고아처럼 밑바닥을 전전하던 그가 모은 돈도 친척들이 가져가 버렸다.

그는 1982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설비 일을 해오고 있다. 그는 손에서 일을 놓은 적이 한번도 없다. 그의 얼굴에는 칠십 평생의 고생이 묻어난다. 하루속히 국가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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