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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니 씨는 전투기 공장노동자로서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직접 전쟁을 체험하였다. 우에타니 씨는 25년 간 우즈라노 비행장에 관한 연구 및 정비/복원 사업에 매진해왔다.
▲ 복원된 시덴카이 앞에서 사진촬영에 응하는 고타니(중앙)씨와 우에타니(좌측)씨 고타니 씨는 전투기 공장노동자로서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직접 전쟁을 체험하였다. 우에타니 씨는 25년 간 우즈라노 비행장에 관한 연구 및 정비/복원 사업에 매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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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나라는 전쟁 중이었고, 그가 좀 더 자라고 나서는 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전 국민이 동원 대상이 됐던 시대였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 소년은, 총을 들고 전선에 나가는 대신 전투기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 위태로운 시대였지만 그는 나라를 믿었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국가의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패전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패전과 함께 소년은 길을 잃었다. 길 잃은 소년은 나침반을 찾아 오랜 세월을 헤맸다.   

나침반을 찾던 소년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됐다. 그가 찾은 나침반은 무엇이었을까.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7월의 뜨거운 일요일, 히메지 인근의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고타니 히로히코(小谷裕彦, 94)씨를 만나 그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즈라노 비행장 부지 내 사무실에서 전쟁체험에 관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 인터뷰에 응하는 고타니(좌측)씨와 우에타니(중앙)씨 우즈라노 비행장 부지 내 사무실에서 전쟁체험에 관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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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니시(川西)라고, 전투기를 만들던 회사가 있었어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회사지만... (저는) 카와니시 소속으로 18살 때부터 이곳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전투기 만드는 일을 했어요."

우즈라노(鶉野) 비행장은 1943년에 건설된 일본해군의 비행장으로, 전쟁 말기 일본군 항공력의 마지막 호흡을 지탱하던 거점 중 한 곳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작전에도 활용됐기에 한국사와도 인연이 깊다. 이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고타니씨는 전투기 공장 노동자로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체험했다.

제해권과 제공권이 특히 중시됐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특성상, 항공력의 확보는 전쟁당사국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사안이었다. 보통의 회사에 소속된 사원이었다면 징집 영장을 피할 수 없었을 시대였지만, 전투기 제조사에 소속돼 있던 고타니씨에게는 전선으로의 출정이 요구되지 않았다.

고타니씨 역시 자신의 땀방울로 모양을 갖추던 전투기들을 보며 사명감과 긍지를 느꼈다. 당시의 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랬듯, 그 역시 조국의 승리를 염원했고 승리하리라 믿었다. '신민'으로서 국가에 보탬이 되기를 원했다.  

"국가를 위해 자원한 사람들도, 강제동원된 사람들도 있었다"
 
1944년 8월 22일 발효된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 12세부터 40세 사이의 미혼여성은 군수공장 등에 동원되어 노동을 강요받았다.
▲ 경례하며 공장으로 입장하는 여자정신대 1944년 8월 22일 발효된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 12세부터 40세 사이의 미혼여성은 군수공장 등에 동원되어 노동을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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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라노 비행장에서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력투구하던 민간인들은 고타니씨와 같은 군수업체 노동자뿐만이 아니었다. 한창 공부하고 뛰어놀아야 할 인근 지역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학도 동원'돼 고사리 손으로 활주로의 초석을 놨다. 고타니씨의 작업장에서는 '정신대' 소속 여학생들이 거친 항공기 부품을 잡고 기술자들을 보조했다. 

국가 전체를 집어삼킨 총력전 체제 아래서 전방과 후방은 따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모든 국민은 전쟁수행을 위한 헌신을 요구받았다.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평화기념 사업을 추진해왔던 우에타니 아키오(上谷昭夫, 82)씨는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원한 사람들도, (타의에 의해) 강제동원된 사람들도 있었다"며 당시 우즈라노 비행장에 모였던 다양한 사람들을 언급했다.

국운을 건 일치단결이 요구되던 시대, 동원에 대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미주리 전함은 가미카제 공격을 받았으나, 항공기를 이용한 자폭에도 불구하고 함 자체는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았다.
▲ 미주리 전함에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기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미주리 전함은 가미카제 공격을 받았으나, 항공기를 이용한 자폭에도 불구하고 함 자체는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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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헌신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실제 상황은 나날이 악화돼 갔다. 1945년 2월에는 우즈라노 비행장에도 가미카제 특공대가 편성됐다. 고타니씨가 근무하던 공장 옆에서, 그의 또래 소년들이 특공을 위한 비행훈련을 받았다. 공장 노동자들이 사적으로 군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기시됐던 까닭에, 고타니씨는 바로 옆에서 비행훈련을 받던 생도들과도 한마디 말을 섞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과 동년배였던 아이들이 떠났을 '돌아오지 못할 하늘 길'을 생각하면, 90대 중반에 다다른 지금도 그의 가슴은 여전히 먹먹해지곤 한다. 실제로 우즈라노 비행장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만 63명이 출격해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어린 조종사는 17살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덴카이는 기존의 일본군 전투기보다 대폭 향상된 성능을 보유한 덕에 미군과의 공중전에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양산이 시작된 시기가 이미 전쟁 막바지였고 생산량 역시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에, 전쟁의 향방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 시덴카이의 시제기 시덴카이는 기존의 일본군 전투기보다 대폭 향상된 성능을 보유한 덕에 미군과의 공중전에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양산이 시작된 시기가 이미 전쟁 막바지였고 생산량 역시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에, 전쟁의 향방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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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고 잊힌 소년

이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타니씨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자신의 임무에 열과 성을 다했다. 기존 일본군 전투기보다 대폭 성능이 향상된 시덴카이(紫電改)를 생산하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긍지이자 한줄기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일부 무기체계를 개선한다고 역전시킬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일개 노동자 고타니 씨의 노력으로는 거대한 전쟁의 흐름을 역류할 수 없었다.   
 
1945년 3월에 우즈라노 비행장이 처음으로 미군의 공습을 받게 된 데 이어,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7월에는 위협적인 공습이 잇따랐다. 결국 안전을 위해 공습 대상인 비행장으로부터 소개됐던 고타니씨는, 다시 비행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조국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된다. 예상치 못했던, 믿고 싶지 않았던 비보였다.
 
고타니씨는 그대로 길을 잃었다. 이미 나라는 전쟁에서 졌기에 자신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방황 속에서 즉각 비행장으로 복귀하지 않았던 것은 크나큰 패착이 됐다. 뒤늦게 우즈라노 비행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공습과 패전의 혼란 속에서 고타니씨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패전 직후 비행장의 공장 노동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 급여뿐 아니라 전후 보상의 대상에서까지 제외되고 말았다.  
 
그 회한이 고타니씨 인생의 향방을 좌우했다. 우즈라노 비행장의 잊힌 노동자는, 사람들로부터 잊힌 우즈라노 비행장을 떠날 수 없었다. 우즈라노 비행장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돼버린 소년은 다시금 힘을 쥐어짰다.
 
고타니씨와 같은 체험자들의 증언과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며 우즈라노 비행장의 역사를 25년 이상 연구해온 우에타니씨는 비행장의 정비와 복원에 힘을 쏟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는 곧 이 세상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란 무엇인지, 평화의 가치가 어째서 소중한 것인지를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요? 풍화되고 잊혀가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미래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작업입니다."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다시 전투기가 날아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즈라노 비행장이 일본인들에게 갖는 가치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무거워 보인다.

우즈라노 비행장의 버려진 활주로에서, 나는 과거로부터 미래로의 '기억의 계승'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
 
일본 내에 전쟁 당시의 콘크리트 활주로가 보존되어있는 것은 우즈라노 비행장이 유일하다.
▲ 우즈라노 비행장의 활주로 일본 내에 전쟁 당시의 콘크리트 활주로가 보존되어있는 것은 우즈라노 비행장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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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쟁체험, #일본군, #비행장,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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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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