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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압하고 태평양 통해 일본과 중국을 굴복시켜

미국은 1898년 스페인을 굴복시키고 태평양과 아시아에 진출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경험하면서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이후 해군을 증강시켜왔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중남미 곳곳에 식민지를 지니고 있었던 스페인과 대립하였다.

당시 미국은 카리브 해의 요충지 쿠바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1859년 상원의원 존 슬리델이 스페인에게 "1억5천만 달러에 쿠바를 매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 가격은 루이지애나의 매입가격의 10배이고 알래스카 매입가격의 20배였으나 스페인은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과 쿠바에게 독립전쟁을 부추겼다. 스페인이 이들의 저항을 진압하자 미국은 스페인의 잔혹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미국이 개입할 명분을 만들었다.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군함 메인호를 쿠바의 아바나에 파견하였다.

폭침으로 위장한 후 전쟁 개시, 쿠바와 필리핀 및 하와이를 찬탈

이 메인호가 원인 모르게 폭파돼 침몰 당하자 미국은 이를 스페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폭침은 1971년 미국 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의 소행이 아니라 보일러실 사고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1898년 파리조약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2000만 달러에 샀으며, 하와이 왕국에 대한 지배도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았다.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인정해준 반면 필리핀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1902년 미국은 "필리핀 군경이 마닐라에서의 미군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며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필리핀인 100만 명을 학살하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당시 일본이 조선반도와 대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입장에선 중국으로 통하는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물류기지를 확보한 셈이었다.

미국, 영국 일본과 함께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아시아를 분할

미국은 스페인 전쟁으로 유럽 강국으로부터 중남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 전쟁으로 미국은 태평양에 대한 지배를 현실화하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인 영국과 동맹관계이기 때문에 일본과 태평양에서 경쟁하기보다는 분할하는 정책을 선택하였다.

미국, 영국이 일본에게 러시아의 태평양으로의 남하를 막게 하되, 일본에게 일본 열도 이북, 즉 한반도와 만주의 영유권을 묵인하였다. 대신 미국은 일본 열도 이남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태평양에 대한 진출은 역시 태평양에 진출하고자 하였던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90년 이후 미국은 급증하는 잉여생산물을 흡수하고, 미국에 원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해외시장이 필요하였다. 중남미에서 유럽과 경쟁하려는 먼로주의는 아시아에서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으로 나타났다.

영토가 충분한 미국,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문호개방정책 채택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에서 기원한 문호개방정책은 미국의 건국이념에 포함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민주주의와 번영은 토지를 소유하고 상품을 수출하는 자유인들의 집단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 역시 식민지에게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미국의 경제적 팽창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한 것도 한편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었지만 신대륙과 유럽 사이의 무역에 종사하고자 하는 동기도 있었다.

문호개방정책에 따르면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통상과 관련된 특혜를 주면 다른 나라도 똑 같은 특혜를 요구할 수 있다. 그 결과 제국주의 열강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약소국을 수탈할 수 있는 국제법적 지위를 얻는다.

함포외교와 결합한 문호개방정책은 '신의 한 수'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은 자유무역을 보장하되 대신 열강들의 새로운 식민지 획득이나 중국의 분할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 속셈은 먼로주의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유럽 열강들을 견제하는 것이다.

미국은 일단 힘의 공백을 만들어 놓은 다음 자신이 그 공백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문호개방정책은 선박 통행의 자유를 포함하였는데, 미국은 아시아 각국의 연안에 거대한 군함을 보내 자유통행을 위한 해안 측량이나 통상조약을 요구하였다.

이때 상대방이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면 무력시위를 하여 전투를 유발하여 군사력으로 통상을 관철시켰다. 미국은 이러한 함포외교(Gunboat Diplomacy)를 일본을 굴복시켰고, 일본은 같은 방식으로 조선을 굴복시켰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는 제국주의의 '최혜국 대우' 조항

문호개방정책은 상호 호혜적인 교류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국은 서구가 아닌 국가에게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그런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이 다른 나라와 더 좋은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을 경우, 미국에게도 그 조건이 자동적으로 체결된다"는 최혜국 대우 조항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한 조항을 미국에게만 주었을 뿐 자신은 적용받지 못하였다.

미국과 청나라는 1868년 과거의 텐진 조약을 수정하고 미국이 중국인의 자유로운 이민을 보장하고 중국에게 최혜국 지위를 허용하도록 하는 벌링게임 조약(Burlingame Treaty)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그 이후에도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하고 중국인들의 이민을 제한하고 중국인 이민자를 차별하였다.

미국, 선발 제국주의의 식민지화에 반대하며 시장 분할 요구

중국에 진출한 미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과 경쟁해야만 하였다. 이에 매킨리 대통령은 열강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문호개방정책을 들고 나왔다.

1899년 미국 국무장관 J.M. 헤이는 "청나라가 이미 개방한 22개 항구에서 특정 국가에게만 부여하였던 특혜관세를 폐지하고 모든 나라에게 평등한 관세, 입항세, 철도요금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나아가 1900년 다른 열강들이 청나라를 점령하는 것을 반대하고 청나라의 영토보존을 주장하였다.

1900년 의화단이 미국 선교사를 처형하고 베이징에 있는 서방 국가의 공관을 공격하자, 청나라는 이에 고무되어 서방국가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헤이 국무장관은 억류된 열강의 외교관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열강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고 외교관을 구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1900년 최초로 베이징 점령한 미군, 중국 놓고 일본과 경쟁

이후 미국은 다른 7개의 서방국가와 함께 군대를 파견하여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미국은 베이징의정서를 통해 다른 서방국가와 동등한 기득권을 보장받았다. 미국이 중국의 내륙에 군대를 보낸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연합군은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 후 3억3000만 달러의 배상을 중국에 요구하였다. 그 중 2400만 달러는 미국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뒤늦게 진출한 미국이 영국, 일본 등과 동등해질 수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만주 진출을 우려한 미국은 1921년 '9개국조약' 체결 당시 다른 열강의 지지를 받아 일본이 1915년 중국에 요구한 '21개조'를 취소하도록 하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뒤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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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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