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전 세계 극장가가 완전히 얼어붙은 지난 3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라이벌을 자처한 DC 확장 유니버스(DCEU)에서는 HBOMAX라는 OTT서비스 채널을 통해 신작 한 편을 공개했다.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이 직접 편집한 <저스티스리그>의 확장판,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리그>였다. 지난 2017년에 개봉해 세계적으로 6억5700만 달러의 아쉬운(?) 성적을 남긴 <저스티스리그>를 새롭게 편집해 공개한 것이다.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연출한 스나이더 감독은 당초 <저스티스 리그>의 연출까지 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 스나이더 감독의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고 충격에 휩싸인 스나이더 감독은 <저스티스리그>에서 중도 하차했다(스나이더 감독이 물러난 <저스티스 리그> 연출은 <어벤저스> 1편을 연출했던 조스 웨던 감독이 맡았다).

하지만 세상에 공개된 <저스티스 리그>의 완성도와 재미는 관객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팬들은 잭 스나이더 감독의 복귀를 원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스나이더 감독이 편집한 4시간 분량의 새로운 <저스티스 리그>가 세상에 공개됐다. 이처럼 지금은 히어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익숙해졌지만 스나이더 감독도 시작은 히어로 무비가 아닌 저예산 좀비영화 <새벽의 저주>였다. 
 
 <새벽의 저주>는 제작비의 4배에 해당하는 짭짤한 흥행수익을 올린 가성비가 높은 작품이다.

<새벽의 저주>는 제작비의 4배에 해당하는 짭짤한 흥행수익을 올린 가성비가 높은 작품이다. ⓒ UIP코리아

 
좀비 영화로 시작해 히어로 무비까지 만든 잭 스나이더

런던에서 미술, 캘리포니아에서 영화를 공부한 스나이더 감독은 미술학도 출신답게 감각적인 영상을 뽑아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는 광고를 만드는 CF 감독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걸어온 길은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마이클 베이 감독과 비슷한데 실제로 스나이더 감독과 마이클 베이 감독은 아트 센터 디자인 대학교의 졸업 동기다(나이는 마이클 베이 감독이 스나이더 감독보다 한 살 더 많다).

스나이더 감독은 2004년 '호러 영화의 아버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스나이더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 <새벽의 저주>는 260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세계적으로 1억200만 달러의 쏠쏠한 흥행성적을 올렸다(이하 박스오피스모조 기준). 다만 국내에서는 전국 3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치며 큰 사랑을 받진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스나이더 감독은 2008년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300>을 통해 스타일과 흥행 성적을 모두 쥔 할리우드의 대표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6500만 달러로 제작된 <300>은 세계적으로 4억5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대박을 쳤다. 특히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된 고속 카메라(슬로 모션)와 CG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내 스나이더 감독 고유의 스타일로 인정 받았다(<300>은 국내에서도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그렇다고 스나이더 감독이 언제나 탄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새벽의 저주>와 <300>의 속편 연출을 고사하고 만든 <왓치맨>과 <가디언의 전설>, <써커펀치>가 모두 제작비도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큰 실패를 맛본 것이다. 3연속 실패가 이어지자 일각에서는 '잭 스나이더 거품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스나이더 감독은 2013년 <맨 오브 스틸>을 통해 세계적으로 6억6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리며 DCEU의 순조로운 시작을 알렸다.

스나이더 감독은 흥행작의 속편 연출을 고사했다가 낭패를 봤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연출해 흥행시켰고 <저스티스 리그> 연출까지 맡기로 했다. 스나이더 감독은 촬영 도중 불행한 가정사로 <저스티스 리그>에서 하차했지만 2019년 감독판 편집을 맡으면서 DCEU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지금도 여러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는 스나이더 감독의 차기작 중에는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도 있다.

호러-액션-드라마가 모두 담긴 좀비영화의 바이블
 
 초반 재난영화였던 <새벽의 저주>는 후반부 화려한 액션영화로 돌변한다.

초반 재난영화였던 <새벽의 저주>는 후반부 화려한 액션영화로 돌변한다. ⓒ UIP코리아

 
최근엔 좀비영화도 장르가 다양해져 여전사가 좀비를 때려잡는 영화(<레지던트 이블>)도 있고 좀비가 등장하는 로맨스 영화(<웜 바디스>)도 있다. 하지만 <새벽의 저주>가 개봉하기 전까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정통 좀비물은 거의 없었다. 80년대 후반 몇 편의 좀비영화가 개봉했지만 좀비 영화의 특성상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어 주요 장면이 대거 삭제된 채로 상영되곤 했다.

<새벽의 저주>는 주인공 애나(세라 폴리 분)가 좀비가 된 남편을 피해 도망간 직후에 나오는 인트로 장면이 압권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세계로 퍼지고 있는 장면을 짤막하게 편집한 영상인데 그야말로 새벽에 일어나는 저주를 집약해 표현한 명장면이다. 특히 영상과 함께 2003년 세상을 떠난 고 조니 캐시의  < The Man Comes Around >라는 음악이 흘러 나오는데 흥겨운 멜로디와 대조되는 섬찟한 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애나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좀비의 습격을 피해 시내의 한 쇼핑몰에 정착한다. 그리고 좀비에게 물려 팔을 다친 프랭크(맷 플레워 분)는 딸 니콜(린디 부스 분)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힘든 곳이라 해도 적응을 마치는 순간 그 곳은 일상이 된다. 쇼핑몰 생활에 적응된 생존자들은 건너편 생존자와 체스게임을 하고 감금방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심지어 악역 스티브(타이 버렐 분)와 단역 모니카(킴 포이리어 분)는 썸도 탄다.

건너편 건물에 사는 생존자(이자 명사수) 앤디(브루스 본 분)에게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 좀비의 습격에서 자유로운 개를 이용하는 작전도 상당히 기발했다. 하지만 굶주린 좀비들은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앤디의 은신처에 잠입했고 개를 구하러 간 니콜마저 위험에 빠지고 만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무사히 구출됐다.

<새벽의 저주>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장면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캐릭터가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연약한 간호사였던 애나는 생존자들을 돌보면서 점점 강인해지다가 막판에는 좀비들의 머리에 마구 총을 쏘는 여전사로 돌변한다. 애나 일행의 무기를 빼앗으며 심한 텃세를 부리다가 감금까지 당하는 쇼핑몰 보안요원 CJ(마이클 캘리 분)도 니콜 구출과정과 도시 탈출과정에서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 빙의한다.

주인공 없지만 모두가 빛나는 <새벽의 저주>
 
 연약한 간호사였던 애나는 후반부 안젤리나 졸리와 밀라 요보비치가 부럽지 않을 여전사로 변신한다.

연약한 간호사였던 애나는 후반부 안젤리나 졸리와 밀라 요보비치가 부럽지 않을 여전사로 변신한다. ⓒ UIP코리아

<새벽의 저주>에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소위 스타배우는 출연하지 않는다. 260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도 문제였고 신인이었던 잭 스나이더 감독에 대한 제작사의 믿음이 약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새벽의 저주>는 소수의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스타배우를 쓸 필요가 없다. 대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스토리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며 영화의 재미를 살려냈다.

영화 속에서 가장 비중이 큰 애나 역의 세라 폴리는 캐나다 출신으로 배우는 물론 감독, 가수, 성우, 프로듀서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주 많은 만능 엔터테이너다. 2007년에는 연출 데뷔작 <어웨이 프롬 허>를 통해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2011년에도 미쉘 윌리엄스와 세스 로건 주연의<'우리도 사랑일까>를 연출하며 다수의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인간적인 흑인경찰 케네스 역의 빙 레임스는 8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다. 딱히 주연으로 출연해 '대표작'이라고 내세울 만한 작품은 드물지만 <데이브>, <펄프픽션>, <콘 에어>, 드라마 < ER > 등 익숙한 작품에 다수 출연했다. 특히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는 이단 헌트의 오랜 동료이자 천재 해커 루터 스티켈 역으로 1편부터 최신작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까지 전 시리즈에 출연했다.

악역 같았지만 알고 보니 단지 직업 정신이 투철했던 반전캐릭터 CJ를 연기한 마이클 켈리는 90년대 중반부터 배우로 활동했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많은 작품에 출연한 대기만성형 배우다. <모범시민>, <컨트롤러>, <크로니클>,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맨 오브 스틸>까지 2000년대 후반부터 그가 출연한 작품의 면면은 대단히 화려하다. 켈리는 인기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도 프랭크(케빈 스페이시 분)의 오른팔 더그 스템퍼를 연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새벽의 저주 잭 스나이더 감독 세라 폴리 빙 레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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