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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시비 전북 정읍시 이평면 배들평야 만석보 유허지. 동진강이 시작되는 둑 위에 서 있는 양성우 시인이 쓴 '만석보' 시비다. 대 서사시로 1894년 1월 조병갑 목을 베고자 일어선 고부봉기와 만석보가 헐리게 되는 역사 서사가 긴장과 축약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 만석보 시비 만석보 시비 전북 정읍시 이평면 배들평야 만석보 유허지. 동진강이 시작되는 둑 위에 서 있는 양성우 시인이 쓴 "만석보" 시비다. 대 서사시로 1894년 1월 조병갑 목을 베고자 일어선 고부봉기와 만석보가 헐리게 되는 역사 서사가 긴장과 축약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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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봉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또한 근대 민족해방 투쟁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된 동학혁명의 봉화가 마침내 올랐다. 

갑오년 3월 21일.
전라도 고부마을 마항(馬頏) 장터에 모인 동학도와 농민들은 접주 전봉준을 주장(主將)으로 추대하고 의거의 깃발을 드날렸다. 본격적인 동학혁명의 신호탄이다.

'혁명'의 혁(革)은 '짐승의 가죽에서 그 털을 다듬어 없애는 것'을 말한다. 즉 혁은 갓 벗겨 낸 가죽인 피(皮)를 무두질하여 새롭게 만든 가죽을 뜻하기에 혁(革)자는 '면모를 일신한다', '고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생명을 일신한다'는 혁명은 묵은 제도나 방식을 새롭게 고치는 뜻을 담고 있다. 결코 민란이나 민요의 수준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동학농민들은 고부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들불처럼 삼남지방에 번지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백성'으로 끊임없이 지배세력의 수탈을 당하고도 힘이 없는 것을 한탄하거나 자신의 박복으로 돌리고 체념했던 호남의 항민(恒民)이, 지배층의 수탈에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순응적이었던 호남의 원민(怨民)이, 이제 정의감에 불타 개혁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호민(豪民)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민란이나 민요(民擾)의 수준이 아니었다. 바로 혁명의 서막이었다. 

교조 최제우가 1864년 3월 '혹세무민'과 '좌도난적'의 죄명으로 처형되고 나서 3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일이다. 고부군수의 야수적인 탐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러면 왜 하필 고부 지역에서 혁명의 봉화가 타올랐을까.

앞에서 소개한대로 고부군은 옛부터 땅이 기름지고 관개시설이 잘 돼 있어서 부촌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탐관오리들이 고부의 수령으로 가는 것을 열망하였다. 중앙권력의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만 고부군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군수가 자주 교체되고 임기를 채우고 떠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원자가 많아서 1년에 군수가 몇 차례 바뀌기도 하였다.
 
사라진 고부 관아 터에 자리한 현재의 고부초등학교 전경
▲ 사라진 고부 관아 터에 자리한 현재의 고부초등학교 전경 사라진 고부 관아 터에 자리한 현재의 고부초등학교 전경
ⓒ 이용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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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수령들의 재임기간을 계산한다면 1573년 (선조 6)부터 1755년 (영조 31)까지 약 180년 동안에 133명의 군수들이 교체되어 재임기간이 1년 반 정도이고, 그 가운데서도 1628년 (인조 6)에서 1644년 (인조 22)까지 17년 동안에 17명의 수령이 교체되어 평균 1년도 채 못 된다. 이러한 이유를 읍 유생들은 풍수지리에 의한 부임역로(赴任歷路)에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 5)

지방유생들이 제기한 풍수설은 믿을 바 못되고, 기름진 농지에서 소출되는 물산을 탐하는 자들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농민봉기 직전인 1893년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되어 고부를 떠났다. 그리고 12월 한 달 동안 6명의 군수가 발령되었으나 한 사람도 부임하지 않았다. 조정에 든든한 뒷배가 닿아있는 조병갑이 재임하게 될 것을 눈치 챈 것인지, 흉흉한 민심을 알아채고 부임을 꺼린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사유로 인하여 농민봉기는 잠시 주춤해 있다가 1894년 1월에 악명 높은 조병갑이 다시 돌아오면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당시의 긴박했던 거사 광경을 목격한 박문규라는 사람이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갑오년, 내 나이 16세 되던 해의 정월 초 팔일은 말목(馬頏) 장날이었다. 석양의 동네 사람들이 수군수군 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동네에서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 소리로 천지가 뒤끓더니 수천 명 군중들이 내 동네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를 죽인다고 민요가 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몰려갈제 군수 조병갑이는 정읍으로 망명 · 도주하여 서울로 도망하였다. 그는 본시 서울의 유세객이다. 민요군은 다시 평명(1월 10일 아침)에 말장터로 모여 수직(守直)을 하니 누차 해산명령이 내렸다. (주석 6)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을 담은 좌상이 그가 처형당하기 전 갇혀 있었던 전옥서터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언제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 녹두장군 전봉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을 담은 좌상이 그가 처형당하기 전 갇혀 있었던 전옥서터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언제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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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고부관아를 점거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선포하였다.

  1. 관속 중에 군수와 부동하고 탐학한 자를 처단한다.
  2. 군기고를 열어 총 · 창 · 탄약을 회수한다.
  3. 읍내의 청죽을 베어 죽창을 만들어 무기가 없는 자에게 주라.
  4. 옥문을 열어 민란의 장두와 원통하게 갇혀 있는 백성을 석방하라.
  5. 창고를 열어 빈민을 규휼하라.
  6. 읍사를 정리하라.

전주감영은 고부봉기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발칵 뒤집혔다. 감사 김문현은 전봉준을 체포하고 난민을 효유키 위하여 병졸 40명을 변복하여 고부에 침투시켰다. 고부의 동학봉기군은 외부 출입자들과 식별하기 위하여 비표처럼 왼손 손목에 노끈을 매고 있었는데, 감영의 병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잠입했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이들 중 책임자 군위(軍尉) 정석진은 살해되었다.

이날 밤 동학군은 대오를 둘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향했다. 예동에서 고부읍으로 통하는 길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치(天峙)재의 서쪽으로 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영원(永元)을 거쳐가는 길이다. 모두 고부읍까지 20리 안팎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주력부대는 영원길을 거쳐 고부관아로 들이닥쳤다. 농민들은 도중에 죽창을 만들어 꼬나들고 11일 (양 2월 14일) 새벽 동헌에 들이닥치니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했다. 날이 밝자 일부 농민들은 말목장터로 나와 원한의 표적이었던 만석보로 몰려가 이를 허물고 예동두전(斗田)에 쌓아놓은 보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말목장터에 자리를 잡고 백산으로 진출하여 진을 치기로 했다. (주석 7)

1811년 (순조 11) 평안도 농민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10여 개 지역의 관아를 점령한 이래 80여 년 만에 고부지역 동학봉기군이 지방관청을 다시 점거한 것이다. 홍경래의 봉기군은 관군에 포위된 채 4개월을 버티다가 성이 폭파됨으로써 진압되고 말았지만 동학군은 달랐다.

그때 조병갑은 이미 도망쳤으므로 남아있던 관리들을 감금하고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화승총ㆍ검ㆍ창)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수가 불법으로 징수했던 세미를 전부 농민에게 반환하고 다시 또 다른 징수의 구실이 되고 있던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폭동에 참가했던 농민들을 결속시켜 대규모의 폭력투쟁을 전개하여 봉건통치자에게 큰 타격을 가할 작정이었지만, 반면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다수의 농민은 고부의 소위 유지들의 권유에 따라 25일에는 거의 전부가 해산하고 말았다. (주석 8)

전봉준은 일단 봉기군을 해산시켰지만, 그렇다고 혁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보다 치밀한 전략의 수립이 요구되었고 동지들과의 협의와 역할분담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략적인 해산' 이거나 '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였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주석
5> 최기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운동연구』, 175쪽, 서경문화사, 2002.
6> 「석남(石南) 역사소설 - 박씨정기(定基)역사」, 『한국학보(71)』 부록, 8쪽, 일지사, 1993.
7>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①」, 『역사비평』, 226~229쪽, 1989년 겨울호.
8> 『조선근대혁명운동사』, 76~77쪽,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한마당.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월, #최시형평전,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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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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