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많은 커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중 상당 수는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이별의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한 쪽이 바람이 나는 경우도 있고 부모의 심한 반대로 인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난치병에 걸리거나 알고 보니 피가 섞인 남매라서 이별을 맞는 경우도 간혹(드라마에서는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빈번한, 그리고 이별을 통보 받는 쪽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이별사유는 역시 '단순변심'이다. 내 사랑은 한결같은데 그 사람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냥 내가 싫다고 하는 사람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후유증도 꽤 오래 간다.

하지만 이 가슴 아픈 이별들을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사랑하던 연인이 사랑이 식어 헤어지는 이야기는 영화적으로 별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이 있는 허진호 감독이 만들면 다르다.

허진호 감독은 멜로영화 역사에 남을 명대사가 2개나 등장하는 영화 <봄날은 간다>를 통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러브 스토리를 담백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봄날은 간다>로 멜로 장르의 대가가 됐다.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봄날은 간다>로 멜로 장르의 대가가 됐다. ⓒ 시네마 서비스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가 다작을 하던 시절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가 됐지만 이영애는 여전히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드라마로는 <대장금>, 영화로는 <친절한 금자씨>라는 확실한 대표작을 가지고 있지만 이영애는 그리 부지런한 활동을 하는 배우는 아니다. 이영애는 데뷔 초 그녀에게 '산소 같은 여자'라는 닉네임을 안겨 준 화장품CF를 비롯해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CF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영애도 짧지만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영애는 1997년 노희경 작가의 <내가 사는 이유>에서 술집작부 역으로 연기변신을 한 후 <애드버킷>, <파도>, <초대> 등의 드라마를 통해 경력을 쌓았다. 2000년 김수현 작가의 <불꽃>에 출연한 이영애는 그 해 여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중립국 감독 위원회의 소령 소피 역을 맡았다. 1997년 <인샬라> 이후 3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였다.

사실 이병헌이나 송강호, 신하균 같은 남자배우들에 비하면 영화 속에서 이영애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 공동경비구역 JSA >는 서울에서만 25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았고 이는 TV 탤런트 이미지가 강했던 이영애가 영화에 집중하는 계기가 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영애는 2001년에도 두 편의 멜로 영화에 출연했다. 봄에 개봉한 영화는 이정재와 호흡을 맞춘 <선물>이었고 가을에 선보인 영화가 바로 <봄날은 간다>였다.

이영애는 <봄날은 간다>에서 이혼의 상처가 있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PD 하은수를 연기했다. 이영애 특유의 분위기 있고 절제된 연기는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했고 <봄날은 간다>는 제22회 청룡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영애 역시 부산 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는 이영애가 데뷔 후 영화배우로서 받은 첫 번째 연기상이었다.

이영애는 2003년 드라마 <대장금>을 만나며 일약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대장금>은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 방영되며 배용준의 <겨울연가>와 함께 '한류드라마 열풍'을 이끌었다. 특히 이란 등 중동권에서는 한국에서의 시청률을 뛰어넘는 믿기 힘든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영애가 <대장금>과 한식 홍보를 위해 해외에 나갈 때는 여느 할리우드 스타들보다 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영애는 2005년 박찬욱 감독의 <천절한 금자씨>로 청룡 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휩쓴 후 배우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고 2009년 재미교포 사업가와 결혼해 2011년 이란성 쌍둥이 남매를 출산했다. 2017년 긴 공백을 깨고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로 컴백한 이영애는 2019년 영화 <나를 찾아줘>에 출연했고 오는 10월에는 JTBC에서 방송될 <구경이>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2개의 명대사로 정리되는 <봄날은 간다>의 정서
 
 <봄날은 간다>의 두 주인공 이영애(왼쪽)와 유지태는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봄날은 간다>의 두 주인공 이영애(왼쪽)와 유지태는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 시네마 서비스

<봄날은 간다>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뻔한 사랑이야기다. 지방 방송국 라디오PD 은수(이영애 분)와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 분)가 일 때문에 만나 소리 녹음 여행을 통해 서로 가까워지고 은수의 변심으로 헤어진다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자극적인 장치 따위는 <봄날은 간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봄날은 간다>가 웰메이드 멜로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2개의 명대사 덕분이다.

은수와 상우가 조금씩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며 가까워졌을 때 은수를 집에 데려다 준 후 아쉬움에 떠나지 못하는 상우에게 은수는 이렇게 말한다. "라면... 먹을래요?" 그리고 은수는 라면봉지를 뜯으며 상우에게 "자고 갈래요?"라는 확인사실 같은 한마디를 던진다.

하지만 은수와 상우의 장거리 연애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은수는 술에 취해 집으로 찾아와 매달리는 상우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변심을 확인한 상우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한마디를 남기며 허탈하게 웃는다. 은수가 너무 보고 싶어 그녀를 찾아갔지만 상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은수의 차를 흠집 내는 것 뿐이다.

<봄날은 간다>는 성룡 영화처럼 NG장면이 나오지도, 마블 영화들처럼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쿠키영상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봄날이 간다>에서는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바로 자우림의 김윤아가 부른 OST <봄날은 간다> 때문이다. 일본의 마츠토야 유미가 쓴 곡에 김윤아가 가사를 붙이고 노래를 부른 노래 <봄날은 간다>는 영화의 여운을 진하게 느끼게 해주는 명곡이다.  

모든 장르의 연기가 가능한 노장배우 박인환
 
 실연의 아픔을 겪는 아들을 위로하는 박인환(오른쪽)도 상당한 연기내공을 선보였다.

실연의 아픔을 겪는 아들을 위로하는 박인환(오른쪽)도 상당한 연기내공을 선보였다. ⓒ 시네마 서비스

 
이혼녀라는 설정이 있지만 영화 속에서 은수 주변인물이 지나치게 나오지 않는다. 혼자 살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이 한 번도 소개되지 않고 친한 친구나 직장동료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상우는 할머니(백성희 분)와 아버지(박인환 분), 고모(신신애 분) 같은 가족들뿐 아니라 녹음실 선배(이문식 분), 택시 운전을 하는 친구(박선우 분) 등 주변 인물들이 제법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젊은 시절 아내를 잃은 후 상우를 혼자 키웠고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사는 아버지 역의 박인환은 영화 속에서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 드는 노련한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은수 때문에 괴로워하는 상우에게 다가가 조용히 소주 한 병을 건네며 "열심히 해 인마"라고 격려해 주는 장면에서는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은 따뜻한 아버지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박인환은 70년대 연극으로 시작해 TV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명배우다. 특히 서민적인 아버지 역할에 특화된 박인환은 1984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최우수 연기상, 2000년 SBS 연기대상 최우수 연기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봄날은 간다>처럼 인자하고 조용한 역할도 잘 어울리지만 김상진 감독의 <돈을 갖고 튀어라>,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 같은 영화에서는 코믹한 매력을 뽐내기도 했다. 2014년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오말순 여사(나문희 분)를 짝사랑하는 박씨 역을 맡아 명연기를 선보인 박인환은 지난 4월 종영한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늦깎이 발레리노로 새로운 연기변신을 시도해 호평을 받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이영애 유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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