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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자금 금액을 정하기 위한 임시 총회는, 작업반장이 절대악(絶對惡)임을 증명하려는 간증 집회의 성격을 띠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듯했다. 명분론자들의 핵심인 반장을 인신공격해서, 그 집단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려는 선동적 전략은 대단히 탁월했다.

실용론자 중에서 이런 계략을 디자인할 책사(策士)가 누가 있을까? 우 이사와 이 이사, 남편과 반장 등 명분론자들은 지독한 혼란에 빠져버렸다. 우 이사가 이쪽에 가담하면서 실용론자 그룹 내에서 브레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 총회가 다시 출자금 문제를 다루는 동안, 우 이사는 예전의 실용론자 동지들의 얼굴을 계속해서 훑어보다가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선전 포고를 날린 모사꾼을 찾아내지 못해서였다.

출자금에 관한 토론의 대립각이 점점 예리해져서, 이젠 양쪽 진영 누구든 가리지 않고 베어버릴 것 같았다. 총회의 의장이었던 나는 정회를 선포한 뒤, 내일 다시 총회를 속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명분론자들은 기습적으로 한 방 얻어맞은 충격으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끝장 토론을 제안했다. 하지만 실용론자들은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마을회관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왜 내일로 미뤘냐고? 오늘 밀어붙여서 끝을 봐야지."

남편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거품을 입에 물고 나를 노려봤다.

"초반에 반장님 얘기한다고 다들 지친 것 같아서. 아저씨, 아줌마들 연세를 좀 생각해 보라고. 토론 더 했다간 다들 나자빠진다고. 사람이 어째 배려심이 1도 없냐!"
"그게 아니라, 와, 돌아버리겠네. 초반에 저렇게 나올 줄 상상도 못했지.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흐른 거고."


마을회관에는 반장과 우 이사, 이 이사와 남편 그리고 나만 남아 있었다. 다들 망연자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밤 시설 장비 관련 설명서와 견적서 등 그들이 준비한 많은 PT 자료들도 넋을 잃고 방바닥에 자빠져 있느라 공개되지 못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여파는 다시 몰려왔고, 침묵 속에서 그들은 하나 둘 마을회관에서 사라졌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지? 반장님 혼자서 투덜대는 습관을 이용해서 공격한 거 말이야. 이건 사전에 완벽한 시나리오가 있었고, 그대로 진행되면서 우리만 바보가 된 느낌이라니까. 누구지?"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충격파의 범위 내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누구긴 누구야. 무산댁, 소평댁, 중평댁 아줌마 중 하나겠지."
"에이, 설마."

"보면 당신은 아줌마들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알아? 그 아줌마들 살아온 날들을 다 더하면 230년이 넘는다고. 그 많은 시간을 살아내면서 당신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겪었고, 그러면서 삶과 정신에 축적되고 쌓인 뭔가가 있을 거라고. 당신에겐 눈곱만큼도 없는 그 뭔가가 지혜 같은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가? 하긴 내가 대학 때 동기 지혜보단 선배 지예 누나를 더 좋아했지. 나 원래 연상 좋아하잖아, 알지?"

"여기 아줌마들도 당신보다 다 연상이니까, 좀 더 애정을 가져 보는 건 어때?"
"이거 왜 이래, 나 아줌마들 엄청 사랑한다구. 암튼 나는 오늘 출자금 문제,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단번에 해결될 줄 알았거든. 내가 아줌마들을 너무 얕잡아 봤나? 내일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 아줌마들 사랑해요, 이렇게 시작할까?"


'배신자'는 바로

세상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그게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적은 내부에 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곳에. 그래, 맞다. 내가 임시 총회의 모든 계획을 짰다. 반장의 말버릇을 이용해 꼬투리를 잡아 시간을 끌도록 무산댁과 사전에 조율했다.

왜냐고? 내가 명분론자 그룹에서 배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남편은 출자금 사태에 접어들면서 내가 당연하게 명분론자들을 지지하는 줄 알고, 내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부부 사이의 균열은 이런 작은 디테일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영화 <무간도>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 임시 총회를 진행하며 남편에게 느끼는 죄의식, 죄책감 때문에 ‘유건명(유덕화 분)’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영화 <무간도>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 임시 총회를 진행하며 남편에게 느끼는 죄의식, 죄책감 때문에 ‘유건명(유덕화 분)’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 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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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총회를 하는 동안 사실 나는 완전히 '쫄았다.'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쫄깃쫄깃한 상태가 이어졌다. 내가 세운 계략이 들통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영화 <무간도>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잘 안 되던 '유건명(유덕화 분)'이 떠올랐다.

늘 '진영인(양조위 분)'의 처지에 공감했었는데, 그날은 희한하게도 내가 유건명이 된 느낌이었다. 아마도 유건명은 황 국장을 비롯한 많은 경찰 동료들에게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꼈으리라. 임시 총회 내내 내가 남편의 눈도 못 마주친 것처럼.

하지만 내가 유건명이 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나이 든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기업 회원 혹은 조합원이라고 불리든 실용론자라고 명명되든, 모든 명칭을 떠나 그들은 나의 동네 친구들, 언니들, 동생들의 부모였다. 내가 뒷산에서 소에게 풀을 먹이고 동네로 돌아올 때, 삶은 감자 한 알을 억지로 내 손에 쥐여 주던 그 사람들이었다.

남편에겐 쫌생이 집단인지 몰라도, 밉든 곱든 그들은 내 존재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남편의 시각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에겐 그들이 현재를 토대로 자신과 미래를 함께할 사람들이라 쩨쩨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아줌마, 아저씨들은 내 과거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선별기 작업을 하고, 밤 껍데기를 깎는 미래의 모습이 남편의 망막에 새겨져 있다면, 내 눈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습 모두가 합쳐지고 섞인 그들이 보이는 것이다. 아쉽게도 남편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눈에 비치는 광경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뭔가 재밌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즐길 수 있는 여가 같은 일을 마을에 제공하려던 게 원래의 목적이었다. 마을기업을 하려는 애초의 취지가 그러했는데, 명분론자들에게 마을은 사라지고 기업만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기업의 부담마저 고 연령층 농부들과 나눠 가지려는 태도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과 결별하고 말았다.

다음 타깃은 남편

"위원장 니가 똑디 아는 거또 없자나. 밤 농사 몇 번 지었다꼬 이래 뭐를 아는 척을 해샀노."

무산댁이 계속해서 남편을 공격했다. 다음날 열린 임시 총회에서 공격 대상은 남편으로 정해져 있었다. 남편이 위원장이라고 불린 이유는 '마을기업 추진 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머리에 앉아가꼬 요래조래 쌩지랄을 다 해보이까네, 머 다 아는 거 같재? 위원장, 밤 선별기 만지는 봤나? 저온콘테이넌동 지랄이동 그거는 우째 사용할 낀데? 여서 그거 할 쭐 아는 인간 하나도 없다 아이가."

무산댁의 기동력을 앞세운 전격전에 남편은 방어 능력을 잃고 사고 체계까지 마비된 듯했다.

"어, 그러니까, 일단은 어, 시행착오의 과정을 어, 좀 거쳐야 할 것 같,"
"됐다 마. 위원장 니 말은 내 돈 300마넌 받아가꼬 연습을 해보게따 요 말 아이가. 내가 살믄서 똑디 배운 게 딱 하나 있다 아이가. 연습은 연습장에만 해야 된다 요건 기라. 우리 둘째 기철이가 국민학교 댕길 쩍에, 한글 연습을 연습장에 안 하고 방 벼루빡(벽)에다 해가꼬, 내가 귀빵매이(귀싸대기)를 쌔리뿌따 아이가. 우리한테 300마너씩 받아가꼬 벼루빡에다 연습을 해뿐다 이 말인데, 잘못되믄 위원장 귀빵매이 다 찢어지뿔 낀데 괜찮겄나?"


전날 반장을 공격한 경험을 쌓은 무산댁은 내가 만든 시나리오를 자유자재로 각색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사실 무산댁이 만들어 낸 것은, 내가 쓴 시나리오에 담긴 인과적 세계관에 비해 훨씬 '레알'하고 날것에 가까운 '찐' 세계관이었다.

남편은 벌써 귀싸대기를 수십 대 얻어맞은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애꿎은 정수리만 벅벅 긁어댔다. 시설 장비들의 설명서와 견적서 같은 상징의 세계에서 우아하게 노닐다가, 무산댁이 쳐놓은 실재의 세계인 거미집에 포획되고 나니, 아찔하고 현기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창립총회 당시 모습. 이날도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창립총회 당시 모습. 이날도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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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론자들은 말문이 막혀서 멍 때리기 모드로 돌입했고, 오직 우 이사만이 감탄의 눈빛으로 예전 동지인 무산댁을 향해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미소를 살짝 흘렸다. 그 미소는 뭐랄까, 꿈나무를 키워 낸, 청출어람에 직면한 감독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형수, 얼마면 되는 거요? 얼마면 되냐고? 출자금? 웃기지 마! 이젠 내 돈으로 다 내버리겠어!"

반장은 <가을동화>의 열혈 시청자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원빈의 그 당돌한 모습과 달리 반장의 목소리에는 애원과 허세와 읍소가 난무했다. 솔직히 덜덜 떨고 있는 목소리와 발화 내용의 불일치가 반장을 개그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십만 원."

무산댁의 대답은 순식간에 총구를 벗어나 반장의 심장을 관통했다. 오만상을 찌푸린 표정만으로도 반장의 심장을 관통한 총알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형수, 뒤에 0 하나 더 붙입시다."
"십만 원."
"형수, 그러면 앞에 5 하나 더 붙입시다."
"십만 원."


명분론자들의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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