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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순교(殉敎)의 길을 걸어간 성인(聖人)의 발걸음을 반추해 본다. 순교는 억압과 박해라는 원인에 죽음이라는 본질로 답하는 희생의 길이다. 가톨릭에서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세우는 일은 '존숭할 자격'을 부여하는 성스러운 행위다. 진정한 신앙고백이나 교리적 덕행의 실천 결과가 죽음이라는 순교로 나타나며, 이로써 모든 죄와 벌이 소멸되고 구원받는다는 믿음의 길이다.
 
가톨릭 박해 역사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새남터. 그 자리에 세워진 기념성당.
▲ 새남터 성지 기념성당 가톨릭 박해 역사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새남터. 그 자리에 세워진 기념성당.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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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여러 순교지가 있다. 가톨릭은 우리에게 그만큼 많은 '피의 선교'를 보여주면서 찾아왔다. 명례방공동체사건을 시작으로 백여 년 시간을 지나오며 기록으로 남은 순교자만 9천여 명에 육박할 지경이다.

한강철교 북단에 위치한 새남터도 이름난 순교지 중 하나다. 당초 군사 훈련소 겸 처형장으로 사육신이 처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가톨릭 많은 순교자들이 새남터에서 신앙고백을 하며 순교한다.

네 차례에 걸친 박해에 수많은 신도들은 물론 주문모 신부, 조선인 최초 사재 김대건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베르뇌 주교와 모방, 샤스탕 외 서양인 다섯 신부 등이 대표적이다. 이웃한 용산 언덕에는 당고개 순교지가 위치한다.

성지가 보이는 곳에 세운 신학교와 성당
  
함벽정 자리에 세워진 신학교와 성당의 모습. 이곳에서 새남터와 당고개 성지가 지척이다.
▲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함벽정 자리에 세워진 신학교와 성당의 모습. 이곳에서 새남터와 당고개 성지가 지척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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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 푸름을 흠뻑 머금은 언덕이 포근하고 평화롭다. 그 언덕엔 우아한 절제미에 안정감 있는 대칭성을 잘 보여주는 신학교와 소담스러운 하느님의 집이 함께 자리한다. 1892년 지어진 최초 성직자 양성소 소(小)신학교는 철거되어 사라지고, 1911년 건립된 대(大)신학교만 남아있다. 소담한 하느님의 집은 1902년 바로 옆에 지어진 원효로 성당이다.
 
성당이 자리한 것으로 보아, 1902년 이후 모습이다. 근대식 정문 기둥 사이에 '函碧亭' 글귀가 보인다.
▲ 옛 함벽정 흔적 성당이 자리한 것으로 보아, 1902년 이후 모습이다. 근대식 정문 기둥 사이에 "函碧亭" 글귀가 보인다.
ⓒ 이영천_성심여중고교 정문 자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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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 지어질 당시 높게만 보였을 언덕은 본래 함벽정(函碧亭)이 있던 자리(현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교정)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백사장엔 새남터가, 동측 언덕으론 기해박해 때 순교의 피를 뿌린 당고개가 지척이다. 지금은 모두 성지가 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건축이 추구하는 입지는 가급적 높은 언덕을 선호하는 경향성을 띤다. 가톨릭 교리를 표현하는 대상물로서 권위 확보와 어느 장소에서든 잘 보이도록 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다. 또한 주변에 순교성지 등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면 선호도는 배가 된다. 이는 통례적으로 인정되어 온 가톨릭 전통으로 한양에선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이 대표적이다.

또한 선교지에서 성직자 양성은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장 주요한 사업 중 하나다. 조선 최초 신학교는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세워 병인박해 때 폐교된 제천 배론 '성 요셉 신학교(배론 신학당)'다. 이후 조불조약 체결 직전인 1885년, 여주 강천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재건하여 암암리에 성직자 양성을 준비한다.

소(小) 신학교

프랑스는 무역 등 통상보다는 가톨릭 선교를 염두에 둔 수호조약을 요구한다.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 위안스카이(袁世凱)까지 동원해 보지만, 고종은 완강하다. 다만 조불조약(1886) 제9관에 '교회(敎誨, 잘 가르치고 타일러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치게 함)와 조선인의 자유로운 고용'이란 내용을 포함시킴으로써, 프랑스는 이를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한다.

외교보다는 선교를 중시한 프랑스는 조약체결을 계기로, 조선 정부의 승인 없이도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암묵적으로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된 셈이다.조선 가톨릭 전권을 쥔 파리외방전교회는 성직자 양성을 위해 한양에 신학교 건립을 서두른다.

조불조약 체결 직후인 1887년 용산 땅을 매입한다.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옮겨와 한옥에서 신학교를 개설한다. 그리곤 곧바로 건축계획에 착수한다. 함벽정이 있던 곳은 신학교로, 삼호정(三湖亭, 현 용산성당)자리는 성직자 묘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좌로부터 나뭇가지 아래가 소신학교(1914), 성당 바로 앞 'ㄷ'자 모양 건물이 1960년대 철거된 소신학교(1892), 현 원료호 성심성당(1902). 대신학교(1911)다.
▲ 옛 신학교와 성당 좌로부터 나뭇가지 아래가 소신학교(1914), 성당 바로 앞 "ㄷ"자 모양 건물이 1960년대 철거된 소신학교(1892), 현 원료호 성심성당(1902). 대신학교(1911)다.
ⓒ 이영천_성심학원 자료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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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정초석을 1891년 5월에 놓는다. 코스트(E. Coste) 신부의 설계로 1892년 6월 25일 축성된다. 조선 최초의 성직자 양성소 '용산신학교'다. 1901년 5월∼1902년 6월까지 김대건 신부 유해를 이 신학교에 모신다. 소 신학교는 1928년 혜화동으로 이전하고 이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 주교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1960년대 철거되어, 이 신학교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대(大) 신학교
  
1911년 11월 완공되어 1942년 일제가 강제로 폐쇄시키기 전까지 대 신학교로 사용한 건물. 1956년 부터 성심수녀회가 사용 중이다.
▲ 대 신학교 1911년 11월 완공되어 1942년 일제가 강제로 폐쇄시키기 전까지 대 신학교로 사용한 건물. 1956년 부터 성심수녀회가 사용 중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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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1911년 대 신학교가 설립된다. 설계와 시공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는 남아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 건립 당시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는 1942년까지 대 신학교로 사용된다. 강제 폐쇄로 학교는 덕원신학교(함경도)로 교정을 옮긴다.

잠시 공백기를 거쳐 1944년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함으로써 건축물이 온전히 존치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1956년 성심수녀회 설립과 함께 수녀회가 인수하여 수녀원과 사무소로 사용하기도 하며, 현재는 성심기념관이다.
 
반지하로 내려가는 활꼴아치 양측면으로 1층에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지붕을 아담한 박공으로 처리하여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벽은 붉은 벽돌이고, 기둥과 창 아치 등은 회색벽돌로 처리한, 절제미와 대칭성이 강조된 조지언 양식 건물이다.
▲ 신학교 정문 반지하로 내려가는 활꼴아치 양측면으로 1층에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지붕을 아담한 박공으로 처리하여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벽은 붉은 벽돌이고, 기둥과 창 아치 등은 회색벽돌로 처리한, 절제미와 대칭성이 강조된 조지언 양식 건물이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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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가 위치한 곳은 앞뒤로 1개 층 높이 차이를 보이는 경사지다. 우아하고 절제된 정면과 중앙 출입구를 중심으로 엄격한 좌우 대칭인 조지언(Georgian) 양식 벽돌조다. 반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면에선 지하층을 노출시켜 마치 3층 건물처럼 보인다. 지면에서 양쪽으로 오르는 중앙계단과 활꼴아치(segmental arch) 지하층 출입구, 1층 현관의 박공모양 캐노피 등으로 중심성을 강조시켰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기둥과 처마, 수평돌림띠, 창 둘레 등 선형(線形) 요소마다 회색 벽돌을 끼워 넣어 미(美)적 효과를 높이려 했다. 직각사각형 평면과 전면 복도에 안쪽으로 교실을 배치하였다. 건물을 7칸으로 구획하고, 각 칸에 활꼴아치 창을 냈다. 경사 지붕엔 환기용 도머 창(dormer window 지붕 아래 방을 밝게 하거나 환기를 위한 지붕창)을 냈다.

원효로 성당
  
고딕 요소가 돋보이는 소담한 성당이다.
▲ 원효로 성당 고딕 요소가 돋보이는 소담한 성당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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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은 신학교 부속성당으로 지어진다. 신학교를 설계한 코스트 신부 설계로 알려져 있으나, 미리 설계가 이뤄진 게 아니라면 그의 생몰연대(1896년 사망)로 보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899년 5월에 착공하여 1902년 4월에 축성된다. 수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작은 규모 강당형식 성당이나, 고딕 요소의 비례가 돋보인다. 디테일에서도 첨두아치(pointed arch, 경간이 넓은 동일 반경의 두 원호를 조합한 아치. 뾰족아치)와 리브 볼트(rib vault, 교차아치 천장 모서리 선을 뼈대로 보강한 볼트), 장미창(rose window), 피너클(pinacle, 탑정(塔頂) 네 귀퉁이 등 곳곳에 세워 장식하는 작은 탑) 등으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준다.
 
아치 창문과 붉은 벽, 회색 버트레스와 첨탑 모습이 조화롭다. 정면에서 보아 3층으로 보이도록 한 것은 교회의 권위와 장중함을 돋보이도록 연출한 건축적 의도로 생각된다.
▲ 원료호 성당 정면 아치 창문과 붉은 벽, 회색 버트레스와 첨탑 모습이 조화롭다. 정면에서 보아 3층으로 보이도록 한 것은 교회의 권위와 장중함을 돋보이도록 연출한 건축적 의도로 생각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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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와 마찬가지로 경사 지형을 이용하여 아래에서 보면 3층이고, 뒷면에서 보면 2층이다. 주 출입구가 한쪽으로 치우친 비대칭이다. 왼쪽에 각각 1층과 2층으로 진입하는 출입구를 내고, 오른쪽엔 제단(祭壇) 출입구가 있다. 내부는 제단과 신자석만 구획하였고, 뾰족아치 창문과 지붕 위엔 작은 뾰족탑이 축약된 고딕양식의 건물 모습이다.

평면은 단순하다. 우선 배랑(拜廊, narthex, 교회 본당으로 연결되기 전에 위치한 단층의 큰 방이나 현관)이 없다. 열주도 없이 제단과 신자석만 있는 단순구조다. 당초 신자석 바닥이 제대를 향하지 않고 중앙 축을 향해 있는 단을 내린 형식이었으나, 보수·복원 과정에서 복도 등을 없애고 편평한 마루로 바뀌었다.
 
좌측의 각진 앱스(apse, 후진(後陣))와 경사지붕, 피너클(첨탑)과 버트레스(부벽) 등이 소담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우측 붉은 벽에 난 문은 출입구다.
▲ 원효로 성당 뒷면 좌측의 각진 앱스(apse, 후진(後陣))와 경사지붕, 피너클(첨탑)과 버트레스(부벽) 등이 소담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우측 붉은 벽에 난 문은 출입구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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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은 대체로 가파르며 앞 쪽은 맞배지붕, 뒤쪽은 5각으로 꺾여 있다. 규모에 비해 다소 육중한 버트레스(buttress, 벽체를 지탱하는 부벽(付壁))가 창 사이마다 설치되어 있고, 버트레스 꼭대기를 작은 첨탑으로 장식했다.

김대건 신부 유해가 1960년 7월 이곳에서 혜화동 가톨릭대학으로 이장한다. 성당엔 김대건 신부를 뜻하는 명문(銘文) A. K.와 생존기간이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부터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까지, 조선교구 1대 교구장부터 8대 교구장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기해·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 유해도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간다. 그 후 순교자들 유해는 혜화동, 명동성당, 절두산 등지로 옮겨지고, 역대 교구장은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한다.

정갈한 두 집을 보면서,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 문화와 교육을 앞세우며 다가온 가톨릭 피의 길과 역사도 같이 생각한다. 두 집은 모든 게 안온한 평화 속에 그저 숙연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1. 2021년 7월 초 코로나19로 학교 출입이 통제되어, 세세한 자료수집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당분간 성지순례도 불가능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2. 친절한 안내와 배려, 조그만 자료를 전해주신 성심여중고교 관계자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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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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