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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추자도 제주도에 속해 있으며,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 그림처럼 아름다운 추자도 제주도에 속해 있으며,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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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서둘러 추자도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제주항으로 향했다. 씨월드고속훼리에서 추자도 왕복 티켓을 내걸고 진행한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뜻밖에도 당첨되는 바람에 모처럼 공짜 여행을 하게 됐다.

추자도는 행정구역상 제주도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육지 쪽이 더 가깝다. 제주도에서 45㎞, 해남에서 35㎞ 떨어졌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제주도 본섬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눈에 보이는 섬의 생김새부터가 다르고, 귀에 들리는 사투리도 사뭇 차이가 난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살면서도 추자도를 가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10월 중순, 일 년 중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다. 아내와 함께 퀸스2호에 승선했다. 파도가 잔잔하고 좌석도 편안해서인지 멀미를 느낄 겨를도 없이 1시간여 만에 상추자도에 도착했다. 이벤트 상품은 당일에만 유효한 2인 왕복 승선권이다.

추자도에서의 일정은 각자 책임이다. 오늘 제주로 돌아가야만 하는 조건이어서, 일단 버스를 타고 가장 먼 하추자도 끝까지 갔다가 다시 상추자항으로 돌아오는 동선을 짰다.

그런데 차질이 생겼다. 육지의 어느 교회 단체팀이 하추자도행 버스를 점령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부근 식당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먹고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이렇게 되면 하추자도를 갔다 온 뒤 마지막 코스로 꼽았던 상추자도의 '나바론 하늘길'을 걸어볼 시간이 부족하다. 영화 <나바론 요새>에서 이름을 따온 이 길은 절벽 위에 길을 내서 만든 트레킹 코스로, 최근 추자도의 최고 관광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어머니와 아들의 기막힌 사연

나바론 하늘길에 앞서 반드시 가봐야 할 데가 있었다. 황경한 묘소다. 정난주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정난주와 황경한 모자의 기막힌 사연을 알게 된 후 언젠가는 추자도를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해오던 터였다.

제주올레길을 걷던 때다. 12코스가 끝나는 용수포구에 도착하니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과 기념성당이 보였다. 차귀도가 보이는 아름다운 포구에 자리 잡은 표착기념관과 배 라파엘 호에 이끌려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념관 앞 야외에 실물모형으로 재현한 라파엘 호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바로 그 배다. 김대건 신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어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던 중 거친 풍랑을 맞아 겨우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용수포구였다.
 
돈대산에서 바라본 추자도 전경 해발 164미터 높이의 돈대산 정상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촬영한 추자도 모습
▲ 돈대산에서 바라본 추자도 전경 해발 164미터 높이의 돈대산 정상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촬영한 추자도 모습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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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둘러보는 중에 2층 전시실에서 뜻밖의 발견(?)을 했다. 제주 관아 노비가 된 정난주 마리아가 66세로 세상을 뜨자, 이 분을 돌보던 이가 추자도에 살고 있던 아들 황경한에게 보낸 편지였다. 액자에 넣어 전시한 편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19세기 한글로 쓰여진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인편으로 추자도에 연락을 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아직도 별세 소식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다시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저려왔다. 마침 한국 천주교의 박해사를 다룬 이런저런 글들을 관심 있게 보고 있을 때였다. 특히 다산 정약용 일가와 천주교, 그중에서도 황사영과 정난주 부부의 가슴 아픈 이야기에 꽂혀 있었다.

정난주 집안은 18세기 후반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초창기 천주교 신앙을 이끌던 쟁쟁한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정난주의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 신앙의 성조(聖祖)로 꼽히는 이벽의 누이였다. 아버지 정약현의 세 동생들, 그러니까 정난주의 숙부가 바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다.

숙부들은 모두 뛰어난 학문으로 유명했지만 천주교 신앙도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중에 신유박해 때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했고, 정약종은 순교자가 되어 오늘날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또 고모부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로 역시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숙부 정약종의 세 자녀, 즉 정난주의 사촌들인 정철상 정정혜 정하상도 모두 순교했다. 이처럼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꼽히는 집안이었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죄로 대거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받아 풍비박산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정난주는 18살에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황사영과 혼인하게 된다. 황사영은 16세에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황사영은 이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그가 보장된 출세길 대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처 정난주와 함께 자연스럽게 일가친척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사영 정난주 부부는 혼인 10년째 되던 해인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부부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정조대왕이 죽고 어린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곧 천주교 박해가 뒤따랐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썼다. 배론의 산속 굴에 은신하면서 비단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호소문을 작성한 것이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실상을 폭로하고, 외국군대를 이용해 조선 정부를 타격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백서는 결국 북경으로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돼 피비린내 나는 탄압으로 이어졌다.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돼 그해 11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다. 정난주와 두 살배기 아들은 제주도와 추자도로,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각각 귀양을 가야 했다.
 
정난주의 묘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낸 정난주 마리아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성역으로 조성됐다.
▲ 정난주의 묘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낸 정난주 마리아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성역으로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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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12월의 혹독한 겨울, 남편 황사영 알렉시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정난주 마리아는 고난의 유배길을 떠난다. 제주로 유배 가던 길, 호송선이 추자도에 머물렀다. 정난주는 이 틈을 타 두 살배기 어린 아들 경한을 저고리에 싸서 바닷가 갯바위 위에 놓고 생이별을 한다. 아기의 옷섶에 황경한이라는 이름을 써두었다.

훗날 역사는 이 기막힌 모자 생이별의 배경을 놓고 여러 가지 설들을 만들어냈다. 가장 그럴듯한 설은, 평생 추자도의 관노로 살아야 할 아들의 운명을 피하고자 호송 나졸을 매수하였다는 것이다. 추측인즉,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를 뇌물로 주고 아들은 호송 중 뱃길에서 죽어 수장한 것으로 거짓 보고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젖도 떼지 못한 아기를 추자도 바닷가에 떼어 놓고 다시 제주로 유배를 떠나는 어미의 심정은 어땠을까. 소설 '난주'의 작가 김소윤이 묘사한 절절한 심정이 너무도 리얼하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종국에는 흘러간다. 그늘도 음지도 해가 들면 다시 꽃을 피운다. 지금 우리가 이러하다고 본래 이렇고 훗날 이렇겠느냐. 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어미는 잊기도 잊으려니와 그리워도 말거라. 사무치는 그리움은 너를 상하게 하니 차라리 그리움을 모르는 것이 나으리라. 극통한 아픔은 이 어미의 가슴에 묻고 피눈물도 어미가 흘릴 것이다. 너는 그저 울고 떼쓰며 입고 먹으며 숱한 세월을 한날같이 아이로 자라거라.
- 소설 <난주> 50쪽에서 인용

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어부 오씨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다. 경한의 후손은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과 단장의 이별을 하고 제주로 온 정난주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정난주 묘소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제주도 대정읍의 관노가 된 정난주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다.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로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정난주 마리아는 비록 피를 흘리며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삶은 '백색 순교'로 일컬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정난주 마리아의 삶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의 증인'이라고 추모하면서 그녀가 묻힌 묘를 성역화해 '대정 성지'로 부르는가 하면, 제주시 외도동에는 정난주 성당도 세웠다.
 
정난주 성당 2009년 제주시 외도일동에 건립되었다.
▲ 정난주 성당 2009년 제주시 외도일동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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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포구의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에서 경한에게 어머니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와 추자도에 떨어진 두 모자는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했을까, 아니 경한은 어머니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는 있었을까?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생을 마쳤을까?

전해지는 말로는, 경한은 자신의 내력을 알고 난 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제주도에서 고깃배가 들어오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랬으니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편지가 추자도로 갔겠지 싶다. 소설 <난주>에서는 모자가 추자도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아무래도 사실은 아닐 것 같다.

눈물의 십자가
  
아무튼 정난주 황사영 황경한의 스토리를 접한 후 언젠가 가보리라 다짐했던 추자도를 왔으니 아무리 나바론 하늘길이 절경이라 한들 우선 황경한의 묘소부터 가야 했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추자도의 경치를 즐기면서 멀리 제주도가 보인다는 하추자도 맨끝 서남단으로 향했다. 버스는 시원한 바닷가 해안도로를 달리다가는 숲이 우거진 길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정겨운 시골마을을 보여주었다.

대략 40-50분은 지났을까. 버스기사가 하추자도 모진이 몽돌해안에서 내려준다. 작고 예쁜 해수욕장을 뒤로 하고 황경한 묘소 방향으로 난 숲길을 올라갔다. 황경한의 묘는 하추자도의 남쪽 끄트머리 언덕, 멀리 제주섬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잠시 묘소 앞에서 묵념을 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바쳤다.
 
황경한의 묘 제주도가 아스라이 바라다보이는 하추자도 서남단에 조성된 황경한의 묘
▲ 황경한의 묘 제주도가 아스라이 바라다보이는 하추자도 서남단에 조성된 황경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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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아래 바닷가 바위에는 '눈물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어린 아들만은 평생을 노비로 살게 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단장의 이별을 해야만 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십자가다. 십자가가 세워진 현장까지 가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태풍으로 일대가 파손돼 통행금지 안내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가장 먼 곳까지 왔으니 발길을 서둘러야 했다. 해안가 마을쪽으로 내려가 버스를 기다릴까, 돈대산길로 걸어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걷는 쪽을 택했다. 열심히 걸어가면 제주행 배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했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연륙교 추자도에서 가장 큰 하추자도와 하추자도의 3분의 1에 못미치는 상추자도를 연결하는 다리.
▲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연륙교 추자도에서 가장 큰 하추자도와 하추자도의 3분의 1에 못미치는 상추자도를 연결하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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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돈대산 정상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은 추자도 전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그리고 부속 섬들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다. 그리고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연결하는 연륙교도 걸어서 건넜다.

첫 번째 추자도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오늘은 추자도에 와야만 할 수 있는 숙제를 하고 가는 느낌이다. 나바론 하늘길이며, 추자올레며, 아름답다는 추자도 낙조가 다음 순서로 벌써부터 대기 중이다.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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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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