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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생화 아빠 ‘도영화원’의 지도영 대표 .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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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자꾸 꽃이 피어있는 곳을 찾게 된다. 사람이 드물어 한적하니 거닐 수 있는 곳이면 더없이 좋다. 서산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대산으로 가다 보면 대로변에 금박골이란 표지판이 서 있다. 오른쪽으로 차를 돌려 구불구불 마을 길로 들어가면 2000평 규모에 아름다운 꽃들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도영화원'이 포근하게 펼쳐져 있다.

"타고나면서부터 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내 생명을 살려준 이 아이들이 더없이 좋습니다. 제 자식들이나 진배없어요. 자다가도 우리 애들이 잘 있는지 뛰어나와 눈으로 직접 봐야 잠이 올 정도에요"라고 말하는 지도영(59) 대표.

지난 11일 '서산시 지곡면 환성1길 157-1'에는 습한 바람 한 점과 옅은 빗방울이 손님을 제일 먼저 맞았다. 밀짚모자를 쓴 그가 차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정원을 보며 감탄을 하자 이렇게 말했다.

"제 가족이에요. 제게는 얘네들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묻는데 보세요. 저 많은 자식이 아빠인 저만 바라보는데 외로울 틈이 어디 있겠어요."

파란색 지붕이 보이는 창고 자리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한우를 키우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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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색 지붕이 보이는 창고 자리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한우를 키우던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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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하는 도중에도 연신 꽃을 보며 미소짓는데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정말 잘 키우셨다. 정원 이름이 대표님 이름을 따서 '도영화원'이라고 지었는데 혹시 만들게 된 배경이라도 있나?
"살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이 얘기를 하려면 26살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지곡 대성국민학교와 대산중학교, 서령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가 하기 싫어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000평 규모에다 논농사를 지었고, 돈을 벌어 축산업을 했다.

내 꿈은 대학 나온 친구보다 먼저 성공하는 것이었다. 많은 돈을 벌고 싶어 서산시 대산읍으로 나가 카페를 차렸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카페가 보편화 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서울로 다니며 사전답사를 했고, 직접 설계도 하면서 셀프인테리어를 했다. 분위기 있는 장소로 변모하니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의 착각이란 걸 알았다.

손님은 많은데 이상하게 수입이 오르지 않았다. 원인 분석을 하니 분위기가 탓이었다. 연인들이 커피만 시켜놓고 나가질 않아 순환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4년 만에 사업장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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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화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시비가 지나는 행인을 반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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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사업을 접고 돌아온 걸 보시고 어머니는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
"우리 어머니는 비록 실패하고 들어왔어도 늘 자식을 믿어 주시는 따뜻한 분이셨다. 그때는 또 권리금을 받고 나왔으니까 돈 번 건 없어도 까먹지는 않았다(웃음). 가만 보면 나는 끊임없이 뭔가를 했던 것 같다. 농사를 짓다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장인가구대리점을 열었다. 120평 규모였는데 상권이 좋지 않아 하루가 다르게 재고만 쌓여 나갔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 또한 셔터를 내려야 했다.

가구점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수금한 돈 280만 원이 손에 잡혔다. 억하심정에 그놈을 바닥으로 패대기치고 말았다. '돈이 도대체 뭐라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어 부아가 치밀었다.

만 원짜리 지폐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날렸다. '이젠 돈도 싫다. 사업이란 것은 내 사전에 없다'고 다짐했다. 더는 방황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내 어머니는 10남매 중 여덟째인 나를 너른 가슴으로 안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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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화원에 있는 싱그러운 터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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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두 번씩이나 실패를 겪었으니 전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을 것 같은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는 그때도 또 일은 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내 주머니에는 단돈 1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들어 갔다. 친구들과 동생들이 나를 찾아 우리 집으로 오면 "며칠 동안 안 들어왔다고 전해달라"고 어머니께 말하곤 집 뒤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랬던 내가 얼마간의 돈줄이 손에 쥐어지자 다시 주식에 손을 댔고 그것마저 1년도 되기 전에 2500만 원이란 큰돈을 잃고 말았다. 바보같이 호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닐 정도로 힘들었다.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 싶어 스스로 자책하며 살았다. 한 마리 달팽이처럼 껍질 속으로 꽁꽁 몸을 감췄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는 내게 세상살이의 척박함을 꿰뚫어 보는 지혜도 안겨 주었다. 그것은 훗날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귀한 경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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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체온이 남아있는 곳에 이쁜 꽃이 놓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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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씩이나 그랬으니 정말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더라. 평소 돈 버는 데는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동산 쪽으로는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날 잘 아는 분이 집으로 찾아와 부동산을 같이 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2004년도에 사무실을 오픈했다. 당시는 부동산 경기가 한창 좋을 때였다. 그것이 밑천이 되어 그동안 손해 본 것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세상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께서 그만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 품에서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꼈다.

사랑하던 내 어머니,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절대 피해를 주지 마라"고 하시며 한푼 두푼 모아둔 돈을 선뜻 건네준 고마운 내 어머니. 몸부림쳐봐야 어머니는 내 곁에 없었다. 동네 노인회장님께서 어머니의 꽃상여를 앞에 두고 어머니의 살아오신 길을 낭독하여 주셨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마지막 가시는 길에 박수를 쳐 드립시다"라고 하는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돌아가신 분에게 박수로 인사를 하다니. 가슴이 미어지면서 감동이 물밀 듯 일었다. 그렇게 내 어머니는 훨훨 이승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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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다가도 일어나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쓰다듬는 지도영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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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와 단둘이 사셨는데 정말 상심이 컸겠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수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그걸 쳐다보며 밤새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둘이 살았던 여러 해, 어머니는 내 마음의 기둥이 되어있었고, 내 세포 구석구석에 따뜻한 체온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로 하루하루 견뎌냈지만 날이 갈수록 용량은 늘어만 갔다.

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내 편이 아니었다. 자살이 실패로 돌아갔자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서울 큰 병원에 갔다. "약은 안됩니다. 이 병을 이기려면 부지런히 걸으십시오. 무조건 걷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정원에 들어섰다. 파란 하늘을 벗 삼아 나를 걱정해주는 꽃들이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다독이는 모습이 오버랩됐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꽃으로 다가오셨구나. 내가 왜 지금껏 몰랐을까'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쓰다듬었다. 여기저기 어머니의 숨소리와 환한 미소가 곳곳에 피어있었다.

그때부터 아침저녁으로 하루 3시간씩 동네를 걸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젊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려고 저렇게 걷냐'는 말을 했다.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그분들은 내 어머니의 마지막을 박수로 보내주신 귀한 분들이었다. 자식 같은 꽃들의 응원에 힘입고 걷고 또 걸었다. 내 몸에서는 서서히 병마가 사라졌고 나는 다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아파하는 분들을 위해 '도영화원'이 치유의 정원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 도영화원 지도영 대표의 아름다운 정원 "코로나19로 아파하는 분들을 위해 "도영화원"이 치유의 정원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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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꽃들이 대표님을 살린 것 같다. 건강해져서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위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세 번 넘어져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마저 내 곁을 떠나버리셨다. 그때는 나만 외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어머니는 꽃으로 다가와 '도영화원' 내 곁에 계신다. 그리고 내 자식 같은 야생화는 또 항상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도 퇴근하면 꽃들과 대화를 한다. 사랑을 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도 죽어버리거나 이쁜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에 밤 늦도록 나와 부대끼며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꿈이 하나 있다. 나는 도영화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생화 정원으로 만들 예정이다. 그리고 나면 이곳을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죽을 만큼 힘든 내가 하늘 정원에 핀 꽃들을 보며 살아냈던 것처럼, 코로나로 아파하는 분들을 위해 도영화원이 치유의 정원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휴일을 반납하고 달려간 곳에서 따스한 선물을 푸짐하게 받은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살아생전 우리 어머니가 '쉬었다 가라'며 손짓한 것처럼 도영화원이 삶이 힘든 많은 분에게 '쉬었다 가라'고 미소를 짓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내 어머니의 아름다운 인생과 꽃들의 정성스런 베풂을 잘 이어받아 쉼이 있는 정원으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들면 언제든 달려오세요.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

아래는 김가연 시인이 '도영화원'을 바라보며 적은 한 편의 '시'다.


도영화원(導迎化園)

햇살 고운 날에 금박골에 가자
선관이 그려 놓은
선경의 꽃밭을 보자

솔바람 아래 자줏빛 아스타
산자락 물들인 다홍빛 칸나

봄날처럼 화사하게
실바람처럼 부드럽게
꽃봉오리 절로 웃는다

그리운 날에 도영화원에 가자
금박을 높은 듯 빛나는
밤하늘 별을 보자

달빛 새섬에 풀벌레소리
안마당 밝히는 반딧불이

그리웠던 마음도
가난했던 사람도
모두 꽃이 되는 곳

발자국마다 꽃이 피고
진 자리마다 별이 뜨는

도영화원에선
사람이 꽃으로 오고
꽃이 사람으로 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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