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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 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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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교인이면서 사회개혁주의자이고 혁명가에 속한다.

하지만 본령은 어디까지나 종교지도자이다. 37세에 동학 제2세 교조가 되었으나 곧 이어 1세 교조가 처형 당하고, 자신은 수배자의 신세가 되면서 동학교단은 파탄지경에 내몰렸다.

수습과 재건 과정에(1887년)첫 부인이 사망하여 상주 봉산에 장례를 치렀다. 선각자들의 가족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김씨부인도 남편의 고난에 찬 행적으로 힘겨운 생을 살아야 했다. 사망 직전에 아들 덕기(德基)의 혼사를 치르고 눈을 감았다.

최시형은 오랜 세월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과 부인과의 사별 등 고통으로 환갑을 전후하여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정부의 탄압이 다소 느슨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동학은 공인되지 않은 '사교집단'이고 그는 '수괴'였다. 행동이 자유스러울리 없고, 거처가 안전하지 않았다.

2세 교조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주위에 도인들이 없지 않지만 자주 바뀌는 일정에 따라 음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61세인 1888년 11월(음) 뒷날 동학 3세 교조가 된 손병희의 여동생과 재혼하였다. 

이 해에 최시형은 금산(金山)의 복호동 김창준의 집에서 임신한 여성이 지켜야 할 수칙으로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반포하였다.

                              내     칙

포태하거든 육종을 먹지 말며 해어(海魚)도 먹지 말며 논의 우렁이도 먹지 말며 거렁에 가재도 먹지 말며 고기 냄새도 맡지 말며 무론 아무 고기라도 먹으면 그 고기 기운을 따라 사람이 아면 모질고 탁하나니,

일삭이 되거든 기운자리에 앉지 말며 잘 때에 반듯이 자고 모로 눕지 말며 침채 채소와 떡이라도 기울게 썰어먹지 말며 울 새 터놓은 데로 다니지 말며 남의 말 하지 말며 담의 너(넘어진) 대(곳)로 다니지 말며 지름길로 다니지 말며,

성내지 말며 무거운 것 들지 말며 무거운 것 이지 말며 급하게도 먹지 말며 너무 찬 음식도 먹지 말며 너무 뜨거운 음식도 먹지 말며,

기대 앉지 말며 비껴 서지 말며 남의 눈을 속이지 말며 이같이 아니 말면 사람이 나서 요사도 하고 황사도 하고 조사도 하고 병신도 되나니,

이 여러 가지 경계하신 말씀을 잊지 말고 이같이 십 삭을 공경하고 믿어하고 조심하오면 사람이 나서 체도도 바르고 총명도 하고 자국과 재기가 사람이 옳게 날것이니 부디 그리 알고 각별 조심하옵소서.

이대로만 시행하면 문왕 같은 성인과 공자 같은 성인을 낳을 것이니 그리 알고 수도를 지성으로 하옵소서. (주석 10)


주석
10> 규장각 소장 동학문서, 여기서는 앞의 책, 345~34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월, #최시형평전,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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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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