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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을 참 많이 닮은 인문학자가 있다. 고미숙은 우리나라 최고의 박지원 연구가이다. 스스로 대학이라는 제도권 교육에 발붙이지 않고, 지금까지 재야의 학자들과 순수한 지적 탐색을 하는 것이 박지원의 삶과 여간 닮아 있는 게 아니다.

최근에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통해 인간의 몸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박지원의 여행기 <열하일기>와 허준의 한의학이 가진 공통점은 '자연스러움'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연의 흐름과 순환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 거스르지 않고, 저항하지도 인위적으로 꾸미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너무 애쓰지도 않고, 그저 스스로 흘러가는 것. 바로 나와 대상이 '상생'(相生)하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서로 기대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박지원을 닮은 인문학자가 말하는 상생(相生)
 
"백수는 인류의 미래다" 고미숙이 말하는 조선에서 백수로 사는 법
▲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백수는 인류의 미래다" 고미숙이 말하는 조선에서 백수로 사는 법
ⓒ 프런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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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에서 작가는 청년들에게 노동 자체에서 벗어나는 '노동해방'과 시장의 흐름에 길들여진 '중독'에서 벗어나 삶 저 너머에 있는 '망상(꿈)을 타파' 할 것을 제안한다. 소비의 주체라는 궤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옆으로 셀 것인가 고민하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18세기를 살아간 연암 박지원의 삶에서 찾는다.

청년들이 꿈꾸는 삶은 '안정' 아니면 '대박'이다. '명문대 열풍, 전문직에 대한 집착, 공무원을 향한 열망. 이 모든 것의 원천은 안정'(p.42)이다. 2030의 상당수가 대박을 꿈꾸지만 그들의 마지막 꿈이란 결국 '집과 연애와 결혼, 한마디로 스위트 홈의 구현'이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안정이란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요원한 일이다.

그들은 금수저로 태어나지도, 명문대를 졸업하지도, 일확천금의 세례를 받지도 않았다. 결국 백수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작가의 생각은 이 '백수'에 대한 역설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찍이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으로 <열하일기>의 길을 따라갔던 작가의 시선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타임 푸어'인 정규직이 아니라 '타임 슈퍼 리치'인 비정규직 백수의 삶은 선험적으로 고귀하다.

선험적으로 고귀한 '백수'의 역설

그런데 이렇게 풍부하고 고귀한 시간에 백수들은 혼술과 혼밥을 하면서 관계를 스스로 단절한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밥을 통해 활력과 기운을 주고 받는 것'(p.96)인데, 일상이 즐거움과 자존감을 스스로 눌러 참으며, 미래의 꿈에 올인하다니!

연암은 젊어서 우울증을 앓으며 괴짜 이야기꾼 민옹과 분뇨 장수를 하던 예덕 선생, 신선술을 닦으며 바람처럼 떠돌던 김신선 등을 만났다. 18세기 문체반정의 핵심 논란에 연암의 글이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특정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관계에서 어긋나 사유의 자유를 얻었다. 관계의 역설은 여기에서 만들어지고, 그 출발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시작된다.
가족 관계가 힘든 건 대화와 접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다. 서로 바쁠 땐 그나마 애틋한 감정이 일지만, 막상 얼굴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감정이 쌓이거나 폭발하기 일쑤다. (중략) 가족은 서로를 서포트해주는 최후의 보루이지, 자기 인생을 펼치는 무대가 아니다. 고로,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중략) 가족에게든 자신에게든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잘 사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에 나가 밤에 돌아오면 된다.(p.156-157)

가족으로부터 정서적,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 새로운 방식의 배움이 그곳에서 가능해진다. 그래서 백수들은 더 적극적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친숙한 이들에게서 낯선 타자들에게로, 궁극적으로 전혀 다른 자신을 만나기 위해'(p.176) 방향을 바꾸어야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이 만들어내는 '엇박'은 파동을 만들고 새로운 스토리를 창조한다. 예기치 않은 파동을 생동감 있게 구성하여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백수는 진정한 '크리에이터'다. 머묾과 떠남의 사이에서 사유하며 정착 속에서 유목을 꿈꾸는 진정한 '노마디즘'이 여기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지배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제3의 길로 나아가는 유목민의 삶. 그것을 위해서는 매순간이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지금, 여기'의 즐거움이 최선의 삶이다.

출발은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물질의 풍요와 정신적 간극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것은 백수의 삶을 출발하기 위한 대전제로써 설득력을 가진다. 작가는 '기술과 부의 순환'을 실현하고, 정규직을 확대하는 것보다 계약직이나 프리랜서의 위상을 높여주어야 하며, 공유 경제의 스펙트럼을 넓혀 '증식에서 증여'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백수는 '네버엔딩 쿵푸'할 수 있다. 여기서 '쿵푸'(功夫, 공부)는 중국 무술의 의미만이 아니라 몸을 통해 익히는 모든 것들이라는 뜻으로 우리말의 '공부'와 같다. 이 책에서는 백수야말로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전 인생에 걸쳐 공부할 있는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이와 관련하여 고미숙은 이와 같은 생각을 그의 저서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북드라망, 2012)에서 기술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는 시험과 동의어고, 시험은 성적으로, 스펙으로, 수치로 환원된다. 결국 청춘은 숫자다! 그 과정에서 신체는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수치가 높으면 세련된 로보캅, 수치가 낮으면 음울한 좀비'(p214)가 된다.

작가가 일찍이 대학이라는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수유 너머>라는 인문학 연구공동체를 만들어 공부와 예술, 서예, 요가, 등산 등 이질적인 활동들을 공존하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도, 최근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에서 '공부로 자립하기'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백수들의 공부 공동체를 일구려고 하는 것도 이 백수만이 할 수 있는 '네버엔딩 쿵푸'의 소망 때문이다.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백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 관계를 확대하고 '지금, 여기'를 즐기며 사는 것. 연암의 소설 <허생전>에서 남산골 샌님 허생이 글공부하던 묵적골이라는 곳과 고미숙이 운영하는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이 있는 '깨봉빌딩'(도깨비방망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이 남산 자락의 필동에 있다는 사실은 작가가 만들어낸 필연이리라.

지금, 여기에서 '네버앤딩 쿵푸'하기

연암의 문체가 특이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근거를 패관잡설(稗官雜說)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현상을 해설하는 근거는 철저히 공맹(孔孟)에 근거해야 한다. 중국 고문(古文)의 범주를 넘어서는 세계의 해석은 감히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연암은 삶의 진리를 일상에서 만나는 범부(凡夫)들, 그것도 거지, 이야기꾼, 신선과 같이 중심에서 어긋나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어디선가 주워듣거나 본 이야기, 하물며 '시'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그렇게 금기시했던 '소설'로 현실의 이상을 그려내기까지 했으니, 조선의 철인(哲人)들에게 내쫓겼을 법도 하다. 정조가 연암의 <열하일기>를 탐독하고는, 오히려 그를 불러 호통을 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조와 연암 모두에게 통쾌하다.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꿈을 꾸어도 좋은 세상. 배움의 경지에 '지식'이 있지 않고 '통찰'이 있는 세상.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제 정보를 AI가 '딥 러닝'하는 세상에서 살아갈 우리 청년들에게 "지나간 것에 매이지 않고, 오지 않은 것에 떨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다. 삶은 오직 현재뿐이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구현되기는 하지만 결국 삶은 현장은 오늘이다."(p.262)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연암은 말한다.
 
"그대는 나날이 나아가십시오. 나 또한 나날이 나아가겠습니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청년 연암’에게 배우는 잉여 시대를 사는 법

고미숙 (지은이), 프런티어(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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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차 국어교사.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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