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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김경일 교수가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말했던 '친구' 이야기가 참 기억에 남는다. 어른들은 자신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하는 친구를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을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의 고향 친구는 예상 밖의 말을 했단다. 

"그냥 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했지. 잘 있나? 잘 있으면 됐다."

이 강연을 들으며 불현듯 그저 내가 잘 있는지 궁금해할 만한 친구가 몇이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런 듯 싶다. 특정 주제가 아니더라도 사는 이야기를 주저 없이 나눌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듯싶었다. 그런데 최근 나에게 그런 인연이 생긴 것 같다.

놀이터에서의 첫 만남, 인연의 시작

나는 올해 4월경부터 뜻하지 않았던 쉼을 맞이하여 유치원생 막내의 놀이터 생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워킹맘일 때는 주말 혹은 어쩌다 나갔던 놀이터를 평일 오후에 여유롭게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회가 남달랐다.

아이는 유치원 하원 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놀이터를 들르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별빛 놀이터, 물고기 놀이터, 과학 놀이터' 등 아이가 부르는 놀이터 이름도 가지각색이었고, 나는 정신없이 아이가 원하는 놀이터로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아이의 하원길 항상 가는 놀이터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아이의 하원길 항상 가는 놀이터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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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아이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맨 채 아이에게 이끌려 어느 놀이터에 도착하였다. 그 때,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OO엄마예요."

당시 나는 심경의 문제로 인한 쾡한 눈,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그리고 부스스한 헤어, 뭔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듯한 거울 속 나의 모습이 너무 싫고 불편했다. 이럴 땐 마스크가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나의 피곤한 모습과 불편한 심경이 상대방에게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아주 담담하고도 밝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우리 아이가 요새 OO이 이야기 많이 하는데, 반갑네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OO엄마는 그의 아이가 내 아이의 이야기도 종종 한다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그의 아이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내 아이의 말에 의하면, OO은 자신이 손을 씻고 나면 휴지를 건네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난 실로 그 아이의 선행(?)과 인성에 감탄하고 있었기에,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새삼 반가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보면 부모가 보이고 부모를 보면 자식이 보인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 하는 말투와 행동 등이 느낌적으로 나와 통할 것 같았고, 왠지 모르게 선하고 따뜻한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던 나에게 그가 물었다.

"근데 일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나오신 거예요?"

"네, 사실 일 하다가... 지금은 몸이 안 좋아서 병가 중이고 이어서 휴직을 하려고 해요... 사실 그게 좀 일이 있었거든요...직장에서..."

나는 주책맞게도 초면이고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려는 찰나, 같이 놀던 어떤 아이가 급히 화장실을 가겠다고 그에게 다가왔고 대화 도중 그는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나는 아차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 줄도 모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피하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잠시 뒤 나타난 그는 집에 가야 할 상황이라 먼저 떠난다며,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순간 그가 나를 이상하게 본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 안도하면서 신속하게 내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는 바로 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나는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시 'OO엄마'로 연락처를 입력했다. 나는 겉보기와 달리, 누가 먼저 연락처를 물어보기 전에 결코 먼저 묻지 못했다. 의외의 낯가림과 소심함이 있는 나에게 이렇게 연락처를 물어보다니... 최근 예상치 못한 불미스러운 일로 의기소침해진 나에게 뭔가 새로움과 설렘을 안겨주었다.

위기를 겪던 나, 새로운 인연과 가까워지다
  
어느날 갑자기 자가격리대상자가 된 자녀
 어느날 갑자기 자가격리대상자가 된 자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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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내 아이가 갑자기 자가격리대상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당혹스럽고 놀랐다. 그러나 그것이 OO엄마와 나를 이어준 계기가 된 듯싶다. 우리는 자녀의 '자가격리'라는 동일한 상황을 겪으면서 동지가 되었다. 처음 겪는 자가격리대상자 통보에 서로 필요한 정보도 교환하고 '힘들고 답답한 14일'을 잘 견뎌보자는 동병상련식 응원과 지지로 우리는 좀 더 친해진 것 같다. 

아이의 자가격리 기간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던 중, 나는 그에게 아이와 함께 14일을 잘 견딘 후 한번 보자며 아무렇지도 않게 '치맥' 제안을 했다. 그는 나의 그 제안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약속을 중요시하는 그의 성품 덕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만나자는 제안은 잘 하는데, 상대방이 그 제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는 나와 달랐다.

그렇게 만난 날, 그는 내가 겪은 일들이 무엇인지 너무 듣고 싶다며, 앉자마자 나의 이야기를 묻고 경청해주었다. 그동안 그토록 하고 싶은 말들을 무수히 글로 풀어내도 무언가 허전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물어봐주는 그가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쌓인 한을 풀어내듯 속사포처럼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는 경청을 넘어 공감을 하며 그의 경험과 최근 들었던 유사 사례까지 들어가며 진지하게 답해주었고 그렇게 하다 보니 깊은 대화로 이어졌다. 놀이터 이후 두 번째 만남에 비하면 상당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사적인 이야기부터 교육, 육아, 직장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나는 메신저로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와 나는 메신저로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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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우리는 메신저로 소소한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그는 내가 기사를 쓰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며 나의 글도 세세히 읽어주고 느낀 점도 정성스럽게 보내주었다. 또한 기사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으며 추천하는 책 이야기를 비롯하여 내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계속 들려주었다. 그는 참말로 배울 점이 가득한 보물 같은 사람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데도, 이렇게 마음이 통하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 있다니 사뭇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도 놀이터 벤치에서 서로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던 중, 아이를 데리고 그가 나타났다. 지난번 동네 커피숍에서 본 이후 메신저만 하다가 직접 만나니 왠지 더 반가웠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곁에 앉아서 말을 건넸고 나는 또다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메신저로만 나누던 이야기들을 만난 김에 다 나누고 가야겠다는 심경으로 신나게 떠들고 있던 나에게 딸이 다가와 말했다.

"엄마, 이제 나 집에 갈래."

평소 같으면 대환호할 일이나 오늘은 참 아쉽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에겐 메신저가 있다. 이렇게 어디서 만나도 반갑고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연이 드디어 나에게도 생겨버린 것이다.

위기 상황이었던 나에게 어쩌면 또 다른 위기인 코로나19가 소중한 인연을 선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서서히 풀어지도록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 그와 앞으로도 어떤 인생 이야기를 할지 사뭇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친구, #인연, #자가격리, #코로나, #자가격리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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