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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장생의 숲길 울창한 숲속길은 한낮에도 나무들에 햇빛이 가려져 약간 어두운 분위기다.
▲ 장생의 숲길 울창한 숲속길은 한낮에도 나무들에 햇빛이 가려져 약간 어두운 분위기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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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주의보가 내렸다. TV는 뉴스시간마다 노약자들은 외출 자제하라는 경고를 내보내느라 바쁘다. 휴대폰에도 밖으로 나가지 말고 가급적 집에만 있으라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든다. 서울은 섭씨 35도가 넘는다고 아우성이다.

제주도 역시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갈 모양이다. 하필 이런 날에 나들이 계획을 세운 게 약간 걸리기도 했으나 제주생활 경험으로 미루어 숲길을 걷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듯해서 예정대로 절물자연휴양림을 향해 집을 나섰다.

장생의 숲길

장생의 숲길은 절물자연휴양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하늘을 가릴 듯이 빽빽하게 치솟아 햇볕을 가려주는 삼나무 편백나무 같은 인공조림숲과 자연숲이 잘 어우러진 11.3킬로의 숲길이다.
  
삼나무 길 인공조림한 삼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다.
▲ 삼나무 길 인공조림한 삼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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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폭염이 찾아온 한낮에도 일단 숲길로 들어서면 시원하다.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데다가 해발고도 자체가 높아 기온이 평지에 비해 4~5도는 낮다.

숲길로 접어드니 예상대로 폭염주의보가 내린 바깥과는 딴 세상이다. 멀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하고, 새들도 쉬지 않고 노래를 해대니 몸과 마음이 절로 상쾌해진다. 삼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빛의 반짝거림이 멋지다. 풋풋한 흙냄새와 향긋한 숲냄새도 후각을 즐겁게 해준다.

아름드리 삼나무와 우거진 자연림 아래로는 수국이며 고사리, 이끼, 천남성, 조릿대 등등이 자리를 다툰다. 가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지나칠 뿐 이 넓은 숲이 오롯이 우리 부부 차지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이 장생의 숲길 코스의 유일한 단점은 휴식을 취할 벤치가 드물다는 점이다. 군데군데 베어낸 통나무가 놓여 있기는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주저앉기에 망설여진다.

40여 분 정도 걸었을까, 비로소 여러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와 벤치, 화장실이 보인다. 이정표를 보니 출발지에서 2.4킬로 지나온 지점이다. 이곳은 장생의 숲길 코스 외에도 한라생태숲으로 통하는 길과 절물휴양림 입구로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다.    
 
장생의 숲길 사거리 갈림길 출발점에서 2.4킬로 지난 지점에 사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한라생태숲으로 갈 수도 있다.
▲ 장생의 숲길 사거리 갈림길 출발점에서 2.4킬로 지난 지점에 사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한라생태숲으로 갈 수도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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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생태숲은 꽃나무들이 많고,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원 분위기의 생태 숲이다. 게다가 이 절물휴양림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어 한번 나들이로 두 군데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시간 여유가 있고 체력만 뒷받침된다면 한라생태숲에서 다양한 꽃나무들을 둘러보고, 장생의 숲으로 건너가 울창한 나무를 바라보며 숲길을 걷는 최고의 힐링 코스라 할 수 있다.

오늘의 목적은 장생의 숲길 걷기니 한라생태숲 쪽으로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숲속길로 들어섰다. 이 숲길에는 500미터마다 이정표가 나타나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를 알려준다. 코스가 제법 길어 지치고 피곤해질 만하면 이정표가 나와 반갑다.

장생의 숲길은 지나온 길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울창한 삼나무 사이로 이어진다. 단조롭다고 느낄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워낙 압도적인 높이의 나무들이 하늘로 치솟아 있으니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배가 출출해지면서 피로도 약간 느껴진다. 바로 이때쯤 장생의 숲길 최고의 휴식처인 연리목(連理木) 쉼터가 나타난다. 연리지(連理枝)는 두 나무의 가지와 가지가 서로 붙어서 나뭇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인데, 이 연리지를 보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는 연리목은 나무 밑동에서부터 두 나무가 하나가 된 것이다. 산벚나무와 고로쇠나무가 서로에게 다가가 하나가 된 이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상념이 머릿속을 맴돈다. 갖가지 이유로 갈등하고, 싸우고, 전쟁하고, 죽이고 하는 데 이골이 난 호모 사피엔스 종이 이 나무들의 아름다운 결합을 보고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장생의 숲길을 걷다 보면 보기 힘든 연리목을 만날 수 있다. 산벚나무와 고로쇠나무가 서로 맞닿아 한몸이 되었다.
 장생의 숲길을 걷다 보면 보기 힘든 연리목을 만날 수 있다. 산벚나무와 고로쇠나무가 서로 맞닿아 한몸이 되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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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리목 주위로 돌벤치와 탁자들이 여러 개가 있어 점심식사나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이다. 우리도 준비해간 김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한여름 대낮 숲의 정취를 즐겼다. 장생의 숲길을 걷는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지금처럼 입장료 내고 오지 않던 시절, 절물휴양림은 한여름이면 제주사람들이 폭염을 피해 가족단위나 마을단위로 피서를 오던 곳이라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인 모양이다.

연리목을 지나면 숲길 종점까지는 3분의 1도 채 남지 않은 셈이다. 다시 힘을 내서 가다 보면 서서히 오르막길이 이어지다가 절물오름으로 가는 안내판이 나온다. 오름의 높이가 해발 697미터, 지금 서 있는 곳은 589미터. 고도가 100여 미터 높은 정상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을 듯하다. 장생의 숲길을 걸을 때마다 그냥 지나쳐 갔는데 오늘은 힘을 내서 오름으로 향하는 계단 길로 들어섰다. 계단과 데크가 잘 만들어져 오름 정상까지 수월하게 올랐다.
 
절물오름 절물자연휴양림에 아름답게 조성된 연못 뒤로 절물오름이 보인다.
▲ 절물오름 절물자연휴양림에 아름답게 조성된 연못 뒤로 절물오름이 보인다.
ⓒ 임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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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까지 한눈에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여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분화구와 정상 순환길도 있고 전망대도 두 군데나 된다. 오늘은 시계가 매우 좋다. 동쪽으로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북쪽으로는 제주시내와 아스라이 추자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아래 그늘에서는 아예 배낭을 베개 삼아 낮잠 자는 사람도 있다. 바람도 적당히 불고 새 소리도 귀를 간질이니 이런 곳에서 낮잠을 자면 말 그대로 꿀잠이 될 듯도 하다.

이 전망대는 새해 첫날 성산일출봉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보기에 최고의 명소일 듯싶다. 이토록 멋진 오름을 지척에 두고도 항상 지나쳐간 게 후회스럽다. 이제부터는 장생의 숲길을 걸을 때면 절물오름은 반드시 오를 작정이다.

절물오름에서 내려오면 다시 장생의 숲길로 되돌아가 얼마 남지 않은 종점까지 가게 되지만 오늘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장생의 숲길 대신 '너나들이길'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의 데크가 놓인 길이다. 목재로 만든 기다란 데크가 지그재그로 이어져 편하게 언덕길을 내려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물약수터에 이르게 된다.

약수터는 오늘이 처음이다. 물도 맛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넉넉했다. 안내문을 보니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경통 위장병에도 특효가 있다고 한다. '절물'이라는 이름도 아마 예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고, 물이 좋아서 생긴 게 아닐까. 약수터를 벗어나면 곧 장생의 숲길 종점이 보이고, 주차장도 지척이다.

누가 제주의 숲길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항상 이 장생의 숲길을 내세운다. 숲길뿐 아니라 제주 전체를 통틀어 가볼만한 곳으로도 이 길을 추천한다.
 
삼나무 아래 핀 새우란 5월하순이면 절물휴양림과 장생의 숲길에는 새우란이 무더기로 피어 눈길을 멈추게 한다.
▲ 삼나무 아래 핀 새우란 5월하순이면 절물휴양림과 장생의 숲길에는 새우란이 무더기로 피어 눈길을 멈추게 한다.
ⓒ 임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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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의 숲길에 이처럼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11킬로가 넘는 긴 코스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제주의 유명한 휴양림마다 숲길을 조성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대개 7~8킬로 안팎의 코스로 돼 있다. 운동을 겸해 숲길을 즐겨 찾는 입장에서는 충분한 효과를 누리려면 10킬로는 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장생의 숲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니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제주에서 발견한 나의 여름 피서지 1호는 단연코 장생의 숲길이다. 아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에 와서 장생의 숲길을 걸을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장생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2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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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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