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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내일이 나 51번째 생일. 51년 전 7월 6일날 어머니가 나 낳안(낳았어)."
"기가(그러니)?"
"나 생일인디 미역국 끓일 소고기랑 생일케잌 살 돈 어머니가 주잰(줄래)?"
"나 돈 이신가(있을까)?"
"난 모르지. 어머니가 어머니 지갑 봐야지."
"지갑은 어디 이신고?"
"이제까지 헌금도 어머니가 지갑에서 계속 꺼냈으니까 잘 생각해보믄 어디 이신지 생각날 거라."


어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나 지갑을 찾아 걸어갔다. '어디에 무엇이 있다'라는 정보가 머리로 정확히 인식되고 말로 바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반복된 행위를 하는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지갑을 들고 온 어머니는 3만원을 꺼내주며, "이거믄 되커냐(되겠니)?"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머니는 조금 모자란 듯한지 "만원 더 주카(줄까)?"라며 만원 한 장을 더 꺼내줬다. 나는 웃으며 4만 원을 받아들었다.

92세 어머니가 준 생일축하금
 
다음날이 내 생일이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고, 상차릴 비용 4만원을 받았다. 딸의 생일에 꺼내줄 돈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이다.
▲ 만원 더 주카? 다음날이 내 생일이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고, 상차릴 비용 4만원을 받았다. 딸의 생일에 꺼내줄 돈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이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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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머니와 나의 생활비를 관리하고 있으니 내 카드로 쓰든 어머니 지갑에서 돈이 나오든 실은 하나의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 생일을 위해 지갑을 열고 얼마 줄까를 생각하는 그 시간이 나는 좋다. 어머니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돈을 받으며 내 생일을 맞지 않을까 싶다.

다음날 아침, 내 생일임을 어머니는 또 잊으셨다. 나는 또 반복한다. 내 생일이라 어머니가 어제 4만 원 준 돈으로 소고기랑 케이크랑 사와서 저녁에 같이 먹자고. 그렇게 내 저녁 생일상이 차려졌고, 오늘 왜 미역국을 끓였는지 저녁 밥상 앞에서 다시 이야기했다. 밥을 먹고 나서 소파 테이블에 블루베리 생크림 케이크를 놓고 촛불도 끄고 생일축하 노래도 불렀다.

어머니는 41세에 나를 낳느라 고생하고 나도 나오느라 애썼을 거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내 나이 이제 52세이니 어머니 나이는 몇 살인가 물었다. 여러 힌트를 주니 결국 어머니는 92세를 맞췄다. 참 오래도 살아졌다며, 할머니는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물으셨다. 104세라 했더니 "우와~!" 하며 놀라셨다.

어머니는 몇 살까지 살고 싶냐 하니 지금 죽어도 괜찮겠다고 하셨다. 사는 게 재미가 없냐고 물으니 너한테 짐만 되고 할 일도 없는데, 굳이 더 사는 게 별로인 것 같다고 하셨다. 제주도 내려와서 어머니랑 같이 사니까 옛날 친구들도 보고 제주도 바다도 맘껏 볼 수 있어서 나는 좋다고, 어머니는 나한테 짐이 아니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가난한 살림에 애들 키우랴 일하랴 고생 많았으니 늙어서 편하게 재밌게 놀다 가면 좋은 일 아니냐 했더니 이렇게 잘 걸어 다니다가 살짜기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어서 할머니 시절에는 지금 어머니가 다니는 주간보호센터같은 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도 하셨다. 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런 사회적 시스템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지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주도 사투리 퀴즈 TV 프로그램을 보며 놀다보니 어머니가 주무실 시간이 거의 됐다. 자기 전 일지를 쓰며 센터 갔다 온 거 말고는 특별히 쓸 게 없다고 했다. 내 목소리에 약간씩 짜증이 실리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날이었냐고, 무슨 날이어서 미역국을 먹었냐고, 그리고 저녁 먹은 후에 여기 소파에서 우리 뭐했느냐고 등등. 기억 저편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는 조금 전의 생일파티를 애써 기억해내며 겨우 일지 쓰기를 마무리하였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존재에 대한 고마움,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늙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안쓰러움, 그리고 '잊는 게 뭐 대수야? 그 순간 좋았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니 왜 금방 있었던 일을 모르는 거야?'라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며 올라오는 짜증 등 여러 감정들로 버무려진 달콤, 짭조름, 쌈싸름한 내 51번째 생일이 저물어갔다.

삶을 응원해주던 친구들이 떠오르는 생일 밤

어머니는 주무시러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지금의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이렇게 어머니와 파트너가 되어 살아가는 것도 여러 가지 조건이 맞은 덕에 이루어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젊은 20·30·40대였다면, 누군가 부모님을 돌보아야 할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삶을 선택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더라도 결단을 내리기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조건, 그리고 늙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는 내 시선의 변화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지금의 인연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생각해보니 지난해 50번째 생일도 제주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6월에 서울에 올라가서 친구들과 반백년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를 미리 거하게 하고, 제주에 내려와서 생일 당일에 조촐하게 어머니와 파티를 열었다. 그때 이미 나는 제주행을 결정했었고, 친구들에게도 이 결정을 알렸다.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내려갈 때도, 지리산에서 제주로 내려올 때도, 앞으로의 삶을 응원해주던 고마운 친구들이다.

몇 년간의 세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지리산에 집을 지을 때도 큰돈을 주저 없이 빌려주던 친구, 그리고 집짓는 와중에 돈이 부족했을 때 십시일반 돈을 모아주었던 이 친구들 덕에 나의 시골살이가 가능했던 것 같다. 평소엔 별로 연락 없이 지내지만, 만나면 반갑고 좋은 인연들이다.

몇 년 전 이 친구들이 지리산에 놀러왔을 때 우리 서로 반백년 생일은 챙겨주자는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 그동안 지리산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나를 포함해서 두 명의 생일파티를 함께 하였다. 내년에 또 두 친구가 50번째 생일을 맞는다. 그때는 제주에서 생일파티를 하자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렇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고마운 인연들을 떠올리며 보내는 생일 밤이 꽤 폭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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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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