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3 12:22최종 업데이트 21.07.13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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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잘못 읽은 조선시대판 감사원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결과적으로 역사발전에 이바지했다. 그의 잘못된 선택은 그에 맞서는 신참 관료를 일약 스타로 만들고. 이 신참을 중심으로 개혁파 관료들이 조정을 가득 채우는 결과로 연결됐다.

오늘날의 감사원과 검찰청이 행정부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이 그런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전부 다 통칭할 때는 3사(司)로 불리고 홍문관을 빼고 부를 때는 양사(兩司)로 불리는 이 관청들은 가장 우수한 관료들이 배치되는 곳이었다.


그중에서 사간원에 관해 <경국대전> 이전(吏典) 편은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관장한다"고 규정했다. 간쟁은 군주의 잘잘못, 논박은 관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이었다. 군주의 국정 운영만큼 시대변화에 민감한 것도 없으므로. 군주에 대해 간쟁하는 이곳의 기관장은 시대를 읽는 능력을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사간원 기관장인 정3품 대사간이 됐으면서도 그런 능력의 부족을 드러낸 인물이 있었다. 음력으로 중종 10년 6월 8일(양력 1515년 7월 18일) 대사간에 임명된 이행(李荇)이 바로 그다.

시대를 잘 못 읽은 '감사원장' 

이행의 판단 착오는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개혁가 중 하나인 조광조의 출현을 가져왔다. 보수 진영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일어난 조광조의 등장은 조선 역사를 한 단계 진일보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그런 면에서 이행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조광조 초상화. 1750년에 정홍래가 그린 작품. ⓒ 위키백과

 
이행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임금이었을 때인 1478년에 출생했다. 본관은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개성시 서쪽)인 덕수(德水)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처럼 그도 덕수 이씨였다.

이행은 만 17세라는 이른 나이에 제2단계 과거시험인 대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했다가 귀양을 간 그는 1506년에 연산군이 폐위되는 중종반정을 계기로 복귀해 홍문관 등을 거쳐 사간원으로 진출한 뒤 대사간이 됐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대사간이 된 날은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한 지 4개월 뒤인 중종 10년 6월 8일(1515년 7월 8일)이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는 음력 3월 2일 사망했지만, 그해 음력 4월과 음력 5월 사이에 윤4월이 있었기 때문에 음력 6월 8일의 대사간 임명은 왕후 사망으로부터 4개월 뒤의 일이 된다.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개혁파인 사림파(유림파)는 중종이 새장가를 들 게 아니라 조강지처 신씨와 재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경왕후는 첫 번째 왕비였지만 첫 번째 부인은 아니었다. 첫 부인인 신씨는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인 데다가 신수근이 연산군 폐위를 반대한 일로 인해 중종반정 7일 뒤인 중종 1년 9월 9일(1506년 9월 25일) 출궁을 당했었다.

남편 중종은 왕이 됐지만, 신씨는 왕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강제이혼을 당했다. 백과사전 등에는 그가 단경왕후로 표기돼 있지만, 왕후로 추존된 것은 죽은 지 182년 뒤인 1739년이다. 비주류인 사림파가 그와의 재결합을 촉구한 것은 신씨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집권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는 데 그보다 유용한 이슈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지배층을 통칭할 때 사용되는 훈구파(勳舊派)라는 표현은 정상적인 급제나 승진보다는 정변에 참여한 공로로 집권세력이 된 뒤 대규모 노비 및 토지를 보유해 권세를 누리게 된 세력을 가리킨다. 유교철학인 성리학을 실천하는 정통 선비들은 훈구파를 싫어했다. 사림파를 형성한 이들은 '정변을 통한 출세'나 '대토지 소유' 같은 것에 거부감을 가졌다.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로 진출해 주로 3사를 장악한 사림파는 그런 적폐를 척결하고 좀 더 건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 사림파가 볼 때, 훈구파의 반격을 덜 받으면서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이슈가 바로 신씨 복귀였다. 연산군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남편에게 죄를 짓지 않은 신씨를 강제 이혼시킨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씨 복귀'는 대중적 확장성을 갖는 이슈였다.

중종을 압박해 신씨를 내쫓은 것은 훈구파였다. 신씨를 복귀시키면 훈구파의 위신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림파는 '신씨 복귀' 이슈에 공을 들였다. 이런 정서를 등에 업고 '신씨를 왕후 자리에 앉히라'는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의 상소에 대해 훈구파는 대응을 자제했다. 조강지처를 복귀시키라는, 그 누구도 반대하기 힘든 상소에 잘못 대처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훈구파는 중종이 신씨와 재결합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정서를 갖고 있었다.

중종이 신씨를 그리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조강지처에 대한 의리보다는 왕권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훈구파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벗어나 강력한 군주가 되기를 무엇보다 희망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씨를 복귀시키면 중종반정의 정당성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연산군이 잘못했다는 전제 하에 그와 관련된 것들을 내쫓는다는 취지에서 신씨 출궁에 동의했으므로, 신씨를 복귀시키게 되면 그 모든 게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훈구파 못지않게 중종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종의 내심을 알고 있었기에 훈구파 대신들은 사림파의 주장을 무시했다. 다음 왕비를 간택하면 자연스레 사그라질 주장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섣불리 대응해 사림파의 결집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대응 전략을 3일 만에 깨트린 인물이 바로 대사간 이행이다. 연산군 치하에서 고초를 겪었던 그는 중종반정의 부정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박상·김정의 상소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검찰총장인 대사헌 권민수를 끌어들여 사간원·사헌부 공동으로 박상·김정 탄핵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가장 똑똑한 관리들을 이끄는 두 기관장이 훈구파의 무대응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발 행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광조의 등장, 보수의 몰락

대사간과 대사헌이 사림파를 자극하는 자충수를 벌인 이 날은 중종 10년 8월 11일(1515년 9월 18일)이다. 이 날짜 <중종실록>은 신씨가 왕비가 되면 아버지의 복수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정 대신들이 화를 입게 될 것이 두려워서 이행이 이 일을 주도했다고 설명한다.

그로부터 11일 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지만 머지않아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일이 일어났다. 이행보다 네 살 적은 만 33세의 운동권 선비 출신인 사림파 조광조가 대과에 급제한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반정 이듬해인 1507년(만 25세)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가 적발돼 의금부에 끌려갔다.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인 점 등이 고려돼 훈방된 그는 그 뒤 '고시 공부'에 매진해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에 급제했다. 소과 급제로 진사 자격을 얻고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그는 중종 10년 8월 22일(1515년 9월 29일) 대과에 급제했다. 그런 뒤 곧바로 정치 이슈에 뛰어들었다.

운동권 기질을 버리지 못해 성균관에서도 '학내 정화운동'을 벌여 눈총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성균관 스타가 된 조광조였다. 대과에 급제한 그는 대사간의 돌발 행동으로 사림파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도달한 그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대과 급제 3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 20일(양력 12월 24일), 조광조는 사간원에 배치됐다. 구실아치(하급 서리·아전)를 제외한 사간원 벼슬아치에서 최말단인 정6품 정언(正言) 자리가 그에게 배당됐다. 이로써 그는 열일곱에 급제해 기관장이 돼 있는 네 살 연상의 대사간을 보좌하는 최말단 벼슬아치가 됐다.

비슷한 연배의 신참 관료를 새로 받은 지 이틀 뒤, 이행은 청천벽력 같은 '내부 총질'을 당했다. 최말단 조광조가 박상·김정에 대한 이행의 탄핵을 문제 삼으며 사간원·사헌부 직원 전원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그런 요구를 중종에 대한 상소문에 담았다.

조광조는 이행의 탄핵이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다. 명백한 잘못을 지은 일이 아니라 의견 표명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감사원장'의 '감사 범위'를 넘는 일로 판단했던 것이다.

중종 10년 11월 22일자(양력 1515년 12월 26일자) <중종실록>에 수록된 상소문에 따르면, 조광조는 '언로를 막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행의 행위를 '언로를 막는 일'로 규정했던 것이다. 사간원에 들어간 지 2일 밖에 되지 않아 정신없었을 신참 관료가 그런 상소문까지 작성했던 것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 조광조는 화순에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았다 ⓒ 이주빈

 
그런 뒤 조광조는 "양사를 파직하여 언로를 다시 여시라"고 임금에게 건의했다. 자신을 포함한 '감사원·검찰청'의 전체 직원들을 파면하고 두 기관을 새로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이 상소는 중종을 당황케 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혼내주지 못하고, 만류하는 쪽을 선택했다. 상소를 배척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광조를 만류한 것은 중종도 그만큼 놀랐음을 의미한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게 설득돼 그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한다.

중종은 조광조가 훈구파에 대항할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다. 훈구파의 압박으로부터 자기 왕권을 지켜줄 인물로 봤던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를 제외한 사간원·사헌부 벼슬아치 전원을 해임한 뒤, 조광조가 사림파를 주축으로 정권을 꾸리도록 해주었다. 유교철학자들로 구성된 개혁파가 정권을 잡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순간이었다. 1516년부터는 이 정권이 조선을 이끌었다.

1520년 1월 10일(음력 12월 20일), 조광조 처형으로 이 정권은 와해됐다. 사림파가 영구 집권에 성공한 것은 1567년 선조 즉위 이후였다. 조광조 정권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사림파가 집권 경험을 갖도록 하는 동시에 개혁세력이 조광조를 기억하면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행의 돌발 행동이 역사를 진일보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중종은 그렇게까지 사림파를 응원하면서도 신씨는 절대 복귀시키지 않았다. 장경왕후 사망 뒤에 그가 맞이한 두 번째 왕후는 문정왕후 윤씨다. 이행이 불필요한 걱정을 했다는 점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대사간 이행은 자기 시대가 사림파의 대약진으로 인해 신·구 세력 간의 긴장감이 팽배한 시대이며, 성급한 탄핵이 사림파의 결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다.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그는 무대에 섣불리 뛰어올랐고, 하필이면 자기 부서 최말단 직원의 공격을 받고 훈구파 정권의 붕괴를 자초했다. '검찰총장 권민수'와 함께 벌인 '감사원장 이행'의 섣부른 행동이 1515년의 보수세력을 궁지로 몰고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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