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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몇 편의 공포영화가 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나. 무료한 주말 저녁 자취방에서 혼자 보았던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 사건>은 정말이지 오금이 다 저릴 정도로 섬뜩했다.

오죽했으면 보는 내내 '꽥꽥' 비명을 질러댄 탓에, 목이 된통 쉬어서 며칠 간이나 고생을 해야 했다. '위이이이위잉' 하는 굉음과 함께 쉴새 없이 전기톱을 휘둘러 대는 살인마의 모습은 당시엔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했다.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함께 감독상 후보로 오른 다른 감독들을 향해 "할 수만 있다면 이 상을 텍사스 전기톱으로 나누어 갖고 싶다"라는 수상 소감을 전했을 땐 새삼 옛 생각이 나면서 반갑기도 했다.
  
십여 년 전에 친구와 함께 보았던 <주온> 또한 잊을 수 없는 영화다. 다만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틈새로 겨우겨우 영화를 보았던 탓에 아직도 그 줄거리를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근에는 <겟 아웃>과 <유전>, <그것> 등을 재미있게 보았다. 생각해보면 딱히 공포 장르의 영화를 선호하는 편도 아닌데 요즘 들어 내가 본 영화 목록에 공포물이 하나둘 늘어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름이 오긴 온 모양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여름은 공포영화를 즐기기에 최적의 계절이다. 흔히 무서운 것을 볼 때 '등골이 서늘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단순한 관용구를 넘어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장면에서 바짝 긴장하다 보면 땀이 흐르고, 땀이 식는 과정에서 체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처럼 낮에는 찌는 듯이 무덥다가 밤만 되면 꿉꿉하게 습한 날들이 이어지는 여름날에는 얼음처럼 시원한 캔맥주와 함께 보는 공포영화야말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딱이다. 그런데 남들 다 보는 흔한 영화 말고, 조금 더 특별한 공포체험을 원하는 당신이라면, 여기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의 '공포 소설' 한 편이 있다.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가 바로 그것이다.  
 
별도 없는 한밤에 표지
▲ 스티븐 킹 "별도 없는 한밤에" 별도 없는 한밤에 표지
ⓒ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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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에서 <샤이닝>, <쇼생크 탈출>과 <그것>에 이르기까지, 스티븐 킹의 소설 중 상당수는 이미 영화화되어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덕분에 작가는 오늘날 가장 잘 팔리는 대중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이야기'에 담긴 대중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힘 때문일 것이다.

발단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그물처럼 잘 짜인 서사는 독자를 숨돌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매혹적인 반전과 살아 숨 쉬는듯한 생생한 캐릭터는 자칫 뻔할 수 있는 클리셰에 눈부신 개성을 더해준다.
  
스티븐 킹의 2009년 작 <별도 없는 한밤에>는 '복수'를 테마로 한 네 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이다. 앞서 얘기한 작가로서 스티븐 킹이 가진 장점을 십분 발휘한, 이를테면 끝내주는 가성비의 패키지 제품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아내를 죽인 날의 고백을 편지 형식으로 담은 '1922'는 도입부 딱 세 문장에서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나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지금부터 나의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1922년 6월 나는 내 아내 알렛 크리스티나 윈터스 제임스를 살해하고 시체를 오래된 우물에 유기했다. 내 아들 헨리 프리먼 제임스도 이 범죄를 거들었지만, 헨리는 그때 열네 살이었으니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 '1922' 11p
 
'1922'는 이처럼 소설의 첫 장에서부터 윌프리드가 어떤 계기로 아내인 알렛을 살해할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열네 살 순진한 소년이었던 아들을 꾀어 끔찍한 범죄에 가담시켰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아내를 죽이고 시체를 옮겨 우물에 처박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숨 가쁠 정도로 속도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묘미이자 반전은 '복수'의 주체가 윌프리드가 아닌 살해된 알렛이라는 점이다. 알렛은 낡은 우물 안에서 복수의 화신이 되어 깨어나고, 자신의 살을 파먹은 쥐들의 여왕이 되어 윌프리드를 찾아온다. 그 모든 것이 윌프리드의 죄책감에서 발현된 망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내가 몸을 더 가까이 숙였다. 살 썩는 냄새는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지독했고, 귀에서 귀까지 찢어진 아내의 웃음은… (중략) 아내의 부러진 턱에서는 얼음의 무게를 못 이기고 꺾어지는 나뭇가지처럼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뒤이어 열 때문에 벌게진 내 귀를 차가운 입술로 누르면서 아내는 오로지 죽은 여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 이야기를 내게 속삭여 주었다. - '1922' 176p
 
매일 밤 살이 썩는 냄새를 풍기며, 또 덜렁거리는 머리통을 좌우로 까닥이면서 남자를 찾아오는 죽은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질 만큼, 작가의 문장력은 마치 생물처럼 싱싱하게 파닥거린다.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변태 살인마를 만나 강간을 당하고 버려진 추리소설 작가가 범인의 정체를 캐내고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빅 드라이버> 또한 작가의 문장이 너무나 살벌하고 생생해서, 한 번에 다 읽기가 괴로울 정도이다. 주인공 '테스'가 부디 복수에 성공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별도 없는 한밤에'는 '1922'와 '빅 드라이버' 뿐 아니라, 복수를 위해 악마와 기꺼이 손을 잡은 남자의 사연을 다룬 '공정한 거래'와 27년을 함께 산 남편이 희대의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아낸 여자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택한 최후의 선택을 그린 '행복한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깊고 어두운 내면을 끄집어내 독자로 하여금 색다른 공포를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스티븐 킹'의 쫄깃쫄깃한 '글빨'이 영화 못지않은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을 물론 상상하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안겨줄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제일 안전한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방구석'이 아닐까? 작년에 이어 올여름 휴가까지 방구석 행이 확정된 당신에게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를 추천한다. 아마 폐가 체험보다 짜릿한, 특별한 '독서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영화로 따진다면, 나의 별점은 별 다섯이다.

별도 없는 한밤에

스티븐 킹 (지은이), 장성주 (옮긴이), 황금가지(2015)


태그:#공포소설, #스티븐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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