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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죽산면 일대는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일대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흔적만큼이나 역사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있다. 인상적인 봉업사지 5층 석탑도 있고, 태평 미륵이라 부르는 매산리 석불입상도 있지만 지금은 죽주산성 안으로 오르는 길이다. 몽골의 매몰찬 침략도 왜란도 이겨낸 이 산성의 실체가 어떨지 무척 궁금해 주차장에서 죽주산성의 동문까지 꽤 경사진 길을 빠르게 올라갔다.  
 
죽주산성의 사실상 정문 역할을 하는 동문은 현재 문루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양옆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죽주산성의 동문 전경 죽주산성의 사실상 정문 역할을 하는 동문은 현재 문루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양옆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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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의 끝에 이미 문루는 불타고 없었지만 성벽과 문의 형태는 고스란히 남은 동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비봉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성벽 안으로 들어서니 텅 빈 공터만 남아 쓸쓸함을 더해가는 듯했다. 

아마 예전에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서 피난 온 백성들과 성을 사수하는 병사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몽골의 침략을 맞아 죽주산성에서 큰 공을 세운 송문주 사당의 안내판이 보인다. 우리에겐 아직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죽주산성을 언급하며 이 장군의 일대기를 짚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고려의 역사지만 그중에서 4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침입한 몽골의 침입은 가장 피해가 극심했고, 고통스러웠던 전쟁이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피해를 주었던 몽골은 고려 민중의 항쟁이라는 의외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성의 죽주 산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심에는 바로 송문주 장군이 있었다. 이미 몽골의 1차 침입 때, 박서 장군과 함께 귀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던 송문주 장군은 3차 침입 당시 죽주 근처에 몽골군이 들어오자 백성들을 산성으로 들어가게 한 뒤 결사항쟁을 펼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몽골은 처음엔 송문주 장군을 회유하려 했으나 오히려 성안의 군사를 출격하며 그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몽골은 본격적으로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봉산을 의지하며 굳건히 지키고 있던 고려군을 공격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포였다.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질 정도로 위기였지만 성안의 군민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역시 포로서 몽골 군대의 침입에 대응했고, 적절한 타이밍에 성의 군사를 몰고 대응해 나가니 15일간의 전투에서 끝끝내 죽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경험을 살려 공격 방법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그를 가리켜 신명(神明)이라 일컬었고, 지금도 산성에는 그의 사당이 남아있다.

그의 사당을 둘러보기 전에 성벽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 들르기로 한다. 비록 세월이 수백 년 흐르긴 했지만 변함없이 굳건하게 이어져 있다. 성벽을 따라 오르는 트레킹 코스로도 인기가 많아 적잖은 사람들이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광경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나도 동문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성벽을 걸어본다.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는 시기인 만큼 풀은 발목까지 무성하게 자랐고, 성벽을 지키던 병사 대신 여치와 메뚜기들이 노닐고 있다. 날이 꽤 더웠지만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성벽의 아래를 내려다보니 과연 천혜의 요새라 할 만큼 전망이 무척 훌륭했다.

어쩌면 이런 경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이 산성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주산성의 하이라이트는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의 포루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풀로 덮인 평원이 나타나고, 범상치 않은 돌무더기의 포루와 어림잡아 몇 백 년 이상 되어 보이는 오동나무 한 그루만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죽주산성을 대표하는 경관인 포루와 오동나무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와 이색적인 풍광을 만끽 할 수 있다.
▲ 죽주산성의 포토존 포루와 오동나무 풍경 죽주산성을 대표하는 경관인 포루와 오동나무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와 이색적인 풍광을 만끽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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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라 할 만하다. 절반 이상 무너져 버린 포대와 오동나무 밑으로 죽산면 일대가 훤히 들어다 보인다. 나는 돌무더기 한편에 기대앉아 예전 죽주산성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 송문주 장군도 이 포대에 서서 저 멀리 몽골군의 동향을 계속 주시했을 것이다.

이 글을 보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히 추천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였다. 이제 성벽을 한 바퀴 돌아 호젓한 숲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길은 어느덧 비봉산으로 올라가는 길과 성벽을 돌아오는 길로 갈린다. 비록 비봉산 정상까지 밟고 싶었던 나지만 앞으로 마주해야 할 안성의 매력이 많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있었다. 하지만 진입로에는 풀이 무릎까지 자라 좀처럼 접근하기 힘들었으며,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겨 그를 마주할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산성의 성안 구역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조그마한 절 한 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빈 공터로 남아있지만 성의 중심부엔 아직도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약수터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산객들의 갈증을 달래주고 있지만, 이런 풍부한 수자원이 있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역사적 상상을 해본다.     
 
죽주산성 성 내부에는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무성하게 자란 풀로 인해 접근하기가 좀처럼 어려웠다.
▲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죽주산성안의 사당 죽주산성 성 내부에는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무성하게 자란 풀로 인해 접근하기가 좀처럼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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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비봉산 정상까지 올라가야겠다는 미완의 다짐을 뒤로하고 이제 죽산면의 다른 문화재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죽산면은 터미널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문화재가 밀접하게 모여있는 지역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다는 걸 뜻할지도 모를 텐데 그 증거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지금은 논밭 한가운데 자리한 봉업사지의 오층 석탑이다. 지금은 찾는 이 하나 없는 한적한 폐사지(廢寺止)지만 이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이곳이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보관하던 진전 사원(眞殿寺院)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절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현재 절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절의 당(幢: 불화를 그린 기)을 걸던 당간지주와 고려 초기의 5층 석탑이 전부다. 하지만 비봉산 자락을 병풍처럼 두르고 1000년 동안을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남겨주고 있다.

이 근처에는 유난히 불교 유적이 많다. 여기서 도보로 10분만 걸으면 통일신라의 유명한 고승 혜승 국사와 관련 있는 죽산리 삼층석탑이 있으며, 뒤로 100미터만 더 들어가면 죽산리 석불입상도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안성까지 내려온 까닭은 바로 이 도시에 산재하는 미륵불들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 길이 쉽지 않다.
     
고려 초기 태조왕건으 초상화를 모신 봉업사지는 현재 5층탑과 당간지주만 남아있지만 주변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함께 돌아보기 좋다.
▲ 고려 초기 태조왕건으 초상화를 모신 봉업사지의 전경 고려 초기 태조왕건으 초상화를 모신 봉업사지는 현재 5층탑과 당간지주만 남아있지만 주변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함께 돌아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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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업사지에서 태평 미륵이라고 불리는 매산리 석불입상을 바로 가려면 논두렁길을 지나가야 한다. 걸어서 가면 산책하기에 꽤 괜찮은 길일지 모르겠지만 차로 갈 경우 난처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길이 고르지 않음은 물론이고, 웅덩이가 깊게 파여 잘못하면 차가 망가질 뻔할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다. 그런 위기를 겪고, 드디어 태평 미륵에 도착했다. 다소 둔탁해 보이기도 하는 거대한 미륵보살은 후에 관촉사의 은진미륵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관촉사의 은진미륵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성에는 수많은 미륵불 가운데 대표할 만한 미륵석불이라 할 만하다.
▲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매산리 석불입상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관촉사의 은진미륵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성에는 수많은 미륵불 가운데 대표할 만한 미륵석불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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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했던 통일신라의 불상과 달리 지방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듯했다. 궁예도 여기 죽주산성에서 기훤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는 비록 몰락했지만 지금도 안성의 곳곳에는 미륵불의 상당수가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으니 날을 잡고 방문해 보면 어떨까? 계속해서 안성의 여행은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일주일 후 작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ugzm87와 블로그 https://wonmin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연, 취재, 출판 등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ugzm@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탁피디의 여행수다 또는 캡틴플레닛과 세계여행 팟캐스트에서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general_list.aspx?SRS_CD=0000013244에서 연재됩니다.


태그:#경기도, #경기도여행, #안성, #안성여행,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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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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