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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그런 라디오 하는 건 '좌초자산(시장 환경의 변화로 자산 가치가 떨어져 상각되거나 부채로 전환되는 자산)'의 연장일 뿐이에요."

경기방송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나온 MBC 라디오 프로듀서(PD)의 말이다.

경기방송은 경기지역 지상파 라디오 방송이다. 사업자가 돌연 자진 폐업하면서 FM99.9 주파수를 반납한 지 1년 4개월여 만에,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새 방송사업자를 선정하기 위한 '사업자 공모'를 준비하고 있다. 공모가 임박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MBC PD는 현재 네이버나 SKT 등 '오디오' 콘텐츠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는 IT업계 흐름을 전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오디오를 차세대 주력 콘텐츠로까지 생각하고 준비하는 디지털 생태계에서 혁신은커녕 기존 라디오와 별다를 게 없는 라디오 사업자가 선정된다면 디지털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할 신규 '좌초자산'이 될 거라고."

그만큼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동감했기에 나는 그런 관점에서 공모를 준비하며 지난 25일 오후 안양 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경기지역 라디오방송사업자선정 정책방안마련 공청회'를 지켜봤다.

이번에도 공정성이나 지역성 등 듣기 좋은 말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겠지만, 핵심은 역시 '먹고사니즘(먹고 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라디오의 '혁신'에 있다고 본다.

디지털 시대에 변변한 수익 모델 하나 없이 먹고살 걱정만 하는 방송국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고, 지역에 충실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번 방통위 공청회에서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지닐지 별 기대 없이 봤다. 그런데 세상에, 기조 발제에 나선 방통위 주무과장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김우석 방통위 지상파방송정책과장
 김우석 방통위 지상파방송정책과장
ⓒ 방송통신위원회 유튜브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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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규사업자 선정은 뭔가 혁신적인 서비스를 개발하고, TV처럼 광고 이외의 수익원을 창출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몰고 오는 사업자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김우석 방통위 지상파정책과장의 말이다. 김 과장은 방송산업시장의 현황이 담긴 자료를 공개하며 라디오 혁신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미디어 산업의 재원이 뉴미디어나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지난 2010년~2019년까지 10년 동안 지상파 TV의 광고는 52%, 라디오는 36.7% 줄었는데, 이상하게도 절반 이상 광고가 빠진 TV 방송사의 전체 매출액은 2.7% 감소에 불과했다.

이유는 온라인을 통한 콘텐츠 제값 받기나 다시 보기 등 디지털 수익의 다변화 때문. TV 방송은 이 수익 다변화를 통해 매출 감소를 완화했다. 반면 라디오는 광고 격감이 곧 매출 격감으로 이어질 만큼 수익 다변화에 실패하고 있다. 이에 김 과장은 이번 공모가 혁신적인 라디오 사업자가 나타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라디오, 특히 TV를 같이 운영하지 않는 독립 라디오의 경우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수익 창출 모델 발굴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책 당국 입장에서는 라디오 방송사들이 연 5억 원 내외의 흑자 구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몰고 오는 사업자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혁신을 키워드로 하는 발제는 이후 토론자로 나선 전문가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상파 위기에도 망하는 사업자 없는 기이한 구조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방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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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로 나선 김재영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새로 등장하는 경기 지역 방송은 기존 구도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밝힌 후 전반적인 지역 방송사의 운영실태를 꼬집었다.

"디지털 뉴스 리포트가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에서 매년 세계 40여 개국을 대상으로 조사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뉴스 신뢰도'와 '지역뉴스에 대한 관심도' 자체가 거의 최하위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정상적이라면 지역 언론이나 지역 방송이 위기에 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망하는 언론이 없는 기이한 현실 자체도 이번 신규 사업자 선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뉴스신뢰도와 지역뉴스 관심도가 꼴찌 수준임에도 망하는 언론사 하나 없는 기이한 구조라고 지적한 김 교수는 새로운 경기 지역 방송이 이런 판을 깨려면 지역밀착성과 지속가능성, 그리고 개방형 혁신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와 같은 조사에서 우리나라 지역 뉴스의 이용 경로로 '지역방송'을 꼽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납니다. 뉴스와 정보의 가치는 '세계화' 될수록 낮아지고 '지역화' 될수록 높아지게 마련이기도 하죠.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이번 사업자 선정 과정의 키워드는 지역 밀착성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속 가능성과 개방형 혁신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 교수가 말하는 개방형 혁신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디지털 전문가가 강조하는 '외부조직과의 효율적 소통구조'가 지역방송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 시대가 전개되면서 많이 이야기하는 게 '미래경쟁력은 조직구성원들과 외부조직 간의 효율적 소통에 달려있다' 입니다. 저는 내부인력만으로 모든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방식에서 외부 공중들, 즉 지역주민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혁신모델을 신규 사업자 중에 고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경기방송을 보라
 
출처 : 방통위 유튜브
▲ 민진영 경기민언련 사무처장 출처 : 방통위 유튜브
ⓒ 방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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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규 사업자 공모에 방송사업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사업자만 공모에 참가할 수 있도록 요건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경기지역 언론시민단체 토론자로 나선 민진영 경기민언련 사무처장은 과거 경기방송 사업자가 폐업 이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저는 (이번 공모요건을) 방송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법인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명쾌하게 경기방송 사업자의 행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경기방송이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2019년 수익을 냈습니다. 그런데 (대주주가) 한 말에 의해 폐업된 후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부동산업을 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헐고 오피스텔을 짓겠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방송이 본업이 아니게 될 때 시청자들의 시청권과 알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방송국은 방송을 주된 것으로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국언론노조의 정책브레인 김동원 박사는 판교 IT 밸리나 파주 출판단지가 있는 경기 지역이야말로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 생산에 적지라며 기존 라디오 사업자가 아니라 '오디오 공급자'를 뽑는 기준을 갖춰 이번 공모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도 학교에서 강의할 때나 노동조합원들을 만날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라디오'라고 부르지 말고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라고 부르자고. 흥미로운 것은 코로나19 이후 구글이나 아마존 심지어 네이버까지 오디오 콘텐츠에 대한 수요와 구독이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네이버의 오디오 클립이나 구글의 플레이북, 아마존의 Audible 등과 같은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들의 발전 방향을 보고 여기에 맞춰 사업계획들을 받고 신규 사업자가 이러한 콘텐츠들을 만들 의지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김동원 전국언론노조 정책협력실장
 김동원 전국언론노조 정책협력실장
ⓒ 방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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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

이날 공청회에서는 신규 사업자의 초기 자본금 규모 요건이나 종합편성 여부 등 공모의 기준과 방법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논의됐다. 김우석 방송통신위원회 지상파방송정책과장이 발제를 맡았고, 김재영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선 호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황준호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방송미디어본부장, 홍문기 한세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최상훈 한국방송협회 정책협력부장,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협력실장, 민진영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이날의 토론을 토대로 곧 경기지역 신규사업자를 위한 공모요건이 세상에 공개되겠지만, 공고문에 명시되든 안되든 '뭣이 중헌지'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공청회였다. 이제 라디오라고 부르지 말고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라고 부르자는 토론자의 말이 20년 라디오 쟁이로 살아온 내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참고자료>
- 방통위 유튜브 '경기지역 라디오방송사업자선정 정책방안마련 공청회' (2021.6.25)
- 서승택, '공식적인 일정 모두 마친 방통위, 99.9MHz 신규사업자 공모 속도낸다' (오마이뉴스, 2021. 6.26)
- 정철운 '99.9MHz 신규 사업자 "운영 안정성, 방송 독립성 중요" (미디어오늘, 2021. 6.26)

태그:#경기방송, #라디오, #오디오, #디지털 오디오 콘텐츠, #방통위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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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99.9 OBS 라디오에서 기후 프로그램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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