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은 늘 카메라 뒤에 서 있지만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는 방송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MBC 인기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은 방송계에 별안간 나타난 이단아 같았다. 외모, 나이, 연차, 인기 등 모든 계급장을 떼고 평등하게 목소리로만 대결하자는 콘셉트는 신선했고 독특하고 화려한 문양의 가면은 생경하기까지 했다. 당시 설 특집 파일럿으로 첫선을 보인 이 프로그램은 단번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화제의 방송으로 떠올랐다. 

그 후로 6년이 흐른 지금 <복면가왕>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예능 포맷으로 손꼽히는 프로그램이 됐다. 전 세계 50개국에 포맷이 수출됐으며 독일, 미국,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6년 휴스턴 국제 영화제 TV 예능부문 동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2020년에는 영국 '2020 국제 포맷 시상식'에서 한국 최초로 베스트 리터닝 포맷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 오래도록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줄 6년 전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복면가왕> 기획안이 3년여 시간 동안 방송가를 표류했다는 건 풍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면을 쓴 스타가 노래한다는 신선한 아이디어가 어떤 사람들에겐 너무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약 9년 전 처음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박원우 작가는 실력 있는 출연자들이 외적인 요소들 때문에 오디션 예능에서 탈락하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생각에서 기획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박원우 작가를 만났다.
 
 MBC <복면가왕> 촬영현장 스틸 사진

MBC <복면가왕> 촬영현장 스틸 사진 ⓒ MBC


"얼굴 가리고 노래하면 실력 볼 수 있잖나"

"대부분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렇다. 큰 돈을 들여서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니까, 장사가 되어야 하지 않나. 우리나라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자가 우승한 경우는 별로 없다. <미스 트롯>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빼면, 대부분 남자 우승자들이 나왔다. 남자가 우승자여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방송가에) 많았다. 그래야 장사가 된다는 거지. 또 하나는, 외모도 중요했다. 실력과 외모를 모두 겸비한 사람이 나오기는 너무 힘들다. 지금처럼 오디션 홍수 속에서 외모에 실력, 인성까지 모두 겸비한 사람이 나오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제가 맡았던 프로그램에서도 외모를 많이 봤었다. 실력자들이 자꾸 떨어졌고."

이야기 도중에 박 작가는 미국 NBC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서 노래하는 한국인들의 영상을 재생했다. 이어서 국내에서 제작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들의 영상도 보여줬다. 그가 가리킨 화면 속의 인물은 아까 보여준 영상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박원우 작가는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정 받을 만큼 이렇게 노래를 잘 해도 (한국에서는) 뽑히지 못했다. 그게 싫어서 가면을 씌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얼굴을 가리고 노래만 부르게 할까. 그러면 실력만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우승을 하고 나서 얼굴을 공개하자. 그때는 이미 인기가 올라가 있을 것 아닌가? 노래가 좋을 테니까. 실력으로 평가받았으니까. 그게 원래 복면가왕의 기획이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생한 기획안을 여러 방송국, 여러 PD들에게 내밀었지만 돌아온 건 탐탁지 않은 반응뿐이었단다.

"'지금은 너무 바빠요', '안 될 것 같아요' 그때는 다들 그랬다. 어떤 PD는 해보겠다고 모 국장님께 당당하게 이 기획안을 들고 간 적도 있었다. 국장님이 '다 좋은데 가면만 빼고 오라'고 했다더라. 2주 동안 연락이 없길래 답답한 마음에 다시 연락을 했지. 'PD님, 안 하실 겁니까? 그럼 다른 방송사에 또 들이밉니다' 이랬더니 다른 방송사에서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결국 <복면가왕>이 MBC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 새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던 민철기 PD에게 우연한 기회로 이 기획안이 넘어가게 된 것. 박원우 작가는 프로그램 첫 회의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민철기 PD님과 만난 날이 12월 5일이다. 딱 한 달 후인 1월 5일 첫 회의를 했다. 이 날짜를 잊을 수 없다. 이날 팀 세팅하고, 2월에 첫 녹화를 했다"고 말했다. 이후 설 특집 파일럿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은 16%의 높은 시청률(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을 기록하며 많은 관심을 받았고, 결국 정규 편성으로까지 이어졌다. 현재는 전 세계에 포맷을 수출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 됐다. 
 
 MBC <복면가왕> 촬영현장 스틸 사진

MBC <복면가왕> 촬영현장 스틸 사진 ⓒ MBC

 
원래 꿈은 소설가... "내 일 아니다" 생각도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다는 박원우 작가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학생이었던 1997년, SBS <한선교의 좋은 아침>으로 방송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매형의 소개로 첫 출근을 했던 그는 그땐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나는 학교에서 시 쓰고 소설 쓰고, 내 작품을 쓰고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때 회당 16만5천 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달쯤 일하다가 내 일이 아니구나 싶더라. 그만두려고 했을 때 소개해준 선배가 돌아오는 길에 엄청 설득을 했다. 거기에 설득 당해서 다시 일을 하기로 했지."

그에게 일이 재밌어지기 시작한 건 MBC <특종연예시티> 막내 작가로 일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그 시절을 "엄청 바빠서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선배 작가가 새벽 5시에 불러서 '너 대본 써놔' 하면, 편집기로 PD들이 편집해놓은 영상 보면서 내레이션 대본을 썼다. 8시에 선배가 오면 수정하고, 11시에 더빙하고. 그러니까 그 새벽에 혼자 여의도 방송국에 앉아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던 게 재미있었던 것 같다. 문장형으로 프로그램 제목을 냈는데 PD가 신선한데? 라고 반응해준 것.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걸 보면 그런 게 아마 재미있었던 포인트였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진 것 말이다."

이날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박원우 작가는 테이블에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커다란 종이에 그리면서 이야기해야 서로 빨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사무실 한 켠에는 이미 여러 개의 종이 묶음이 한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방송작가의 중요한 자질은 그림과 영어라고 설명했다.

"이게 버릇 같은 건데, 그림으로 보여줘야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상대방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모든 걸 다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종이를 모아두는 이유도 혹시 기억이 안 나면 다시 펼쳐서 볼 수 있게끔 하려고 그런 거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누가 내게 방송작가의 요건이 뭐냐고 물어보면, (요즘은) 영어 잘하고 그림 잘 그려야 된다고 말한다.

요즘에는 특히 영어가 너무 필수다. <복면가왕>에 미국 MLB에 있는 NC 다이노스 출신 선수 에릭 테임즈가 출연한 적이 있다. 그와 처음 연결을 해준 건 (스포츠 브랜드) 뉴에라였는데, 그다음 순서에는 우리 쪽 담당자가 있어야 하지 않나. 이럴 때 작가가 통역을 해야 한다. 통역을 쓰면 비싸니까. 그리고 해외 시장으로 발을 넓혀야 작가들의 권리가 커진다는 걸 우리가 알아버렸다. 이제 해외 방송사와도 다이렉트로 일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중요하다."


현재는 방송 프로그램 포맷을 연구·개발하는 회사 '디턴'의 대표가 된 박원우 작가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방송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아직 방송되지 않은 프로그램을 포함해, 현재 참여하고 있는 방송만 17개에 달할 정도. 그 중에 절반 이상은 폭스TV, 워너 브라더스, 소니 픽쳐스 등 해외 방송국과의 작업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꾸 저한테 '바쁘죠? 요즘 일 몇 개 해요?' 이렇게 묻는다"며 "나같은 사람이 바쁜건 당연한 것 아닌가. 바쁘냐고 안 물으셨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바쁘게 일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한테는 IP(지적재산권)가 없지 않나. 그래서 이 회사를 만든 거다. 회사에는 PD도 있고 작가도 있다. 아이디어도 내고, 포맷 판매도 하고. 디(di)턴이라는 회사명에도 숨겨진 의미가 있다. di를 돌리면 ip가 된다. ip를 (원작자가 꼭)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시스템이 계속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송사에만 요구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우리같은 사람들(작가들)도 노력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적재산권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돈 좀 잘 벌면 개인사업자 내고 법인으로 전환하고 세금이라도 절세하자. 이렇게 할 게 아니라, 돈 번 만큼 재투자 해서 시스템을 바꾸면 더 좋은데 그게 지금 안 되고 있다. 그래서 저는 방송사에게만 요구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방송사는 이 시스템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 나름대로도 항상 약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MBC <복면가왕> 촬영현장 스틸 사진

MBC <복면가왕> 촬영현장 스틸 사진 ⓒ MBC

 
한편 <복면가왕>은 격주로 화요일마다 녹화를 진행한다. 복면을 쓴 8명의 스타들이 토너먼트식으로 1라운드를 치르고, 이어 승자들끼리 2, 3라운드와 가왕전까지 한꺼번에 촬영한 뒤 2주에 걸쳐서 방송된다. 이는 6년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박원우 작가는 "시스템이 단 한 번도 안 바뀌었다. 음악 감독도 그대로고, 밴드 팀, 코러스도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6년 전 그대로다. 프로그램이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불가피하다. 박 작가는 제작진들도 매주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노력하고 있고 점점 바뀌고 있다. 같이 일하는 작가들이 좀 더 버라이어티하기를 원한다. 처음에는 저도 (가면을 쓴 출연자에 대한) 힌트가 너무 개인기에 치중돼 있어서, 여러 가지 힌트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게임으로 맞추기를 해본 적도 있다. 처음에 힌트를 다양하게 주자고 했는데 그게 결국은 군더더기처럼 보여서 잘 안 됐거든. <복면가왕>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데 어느 순간 하나둘 정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출중한 가창력을 자랑하는 보컬리스트부터 아이돌 가수, 래퍼, 배우, 스포츠 스타 등 다양한 스타들이 출연해 온 <복면가왕>은 지난 6년 동안 50여 명의 가왕을 탄생시켰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왕은 역시 9승 대기록을 달성한 '우리동네 음악대장'(하현우)이다. 2016년 고 신해철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를 불러 가왕에 오른 하현우는 프로그램을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으로 꼽히기도 한다. 박원우 작가는 새로운 가왕에 대한 고민을 늘 한다면서도 '우리 동네 음악대장' 기록이 깨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가왕에 대한 고민은 항상 한다. 다음에 가왕이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좋을까. 가왕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운명적인 것 같다. 하현우씨가 (가왕이) 됐을 때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래부를 때 고음 지르는 게 너무 시원하고 신선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프로그램의 인기도 좋을 때였고 하현우의 노래로 인해 (프로그램의 인기가) 더 올라가기도 했고. 하현우씨는 <나가수>에도 나왔지만 <복면가왕>에서는 완전히 얼굴도 가리고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 충분히 (사랑받는 게)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럴만한 사람을 많이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음악대장의) 기록이 일부러 깨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어? 좋다. 누구지?' 이 정도여야지, '누굴지? 누굴까? 노래는 좀 하네'라는 마음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나와서 그 기록을 깨면 이슈는 될 테지만, 억지로 장기 가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음악대장의 기록을 깬다고 해도 지금은 사람들에게 크게 집중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현실도 잘 알고 있다. 시청률이 다시 옛날처럼 16%를 기록하려면 아마 30번은 가왕을 해야 할 거다. 1년 동안 가왕 자리를 지키는데 매번 노래가 다르고 다 신선하다면 가능할까 싶다."


그동안 미디어 시장도 변했고 콘텐츠 경쟁도 더 심화되면서, 이제 예전처럼 주목받기는 어려운 환경이 됐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박원우 작가는 (<복면가왕>도) 본질로 돌아가서 음악에 더 집중한다는 원칙을 잃지 않으려 한다고. 그는 <복면가왕>이 사람들에게 음악 프로그램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음악 프로그램이니까 음악에 더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 300회 동안 2000명 이상의 복면 가수가 출연했다. 한 사람당 3곡씩 가지고 나온다. 누군가는 두 곡 부르고 가지만. 반복도 많고, 선곡이 겹치기도 하니까. 보는 사람들도 지겨워질 수 있다. 그럴 때 게임을 더 재밌게 만들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음악을 더 듣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그게 좀 약해지고 있지 않나 고민이다. 

좋은 스타를 섭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나와도 가면을 쓰고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나온다고 말도 못한다, 가면을 벗기 전까지(웃음). 방송 시간 내내 댓글로 사람들이 '누구지? 누굴까?'라고 추측하더라도 실시간 검색어가 없어서 시청률이 안 오를지도 모른다. 대신 음악이 좋아서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에게, 일요일 저녁시간대의 음악 프로그램이라는 인식이 확 박혀 있다면 된 것 같다."
박원우작가 복면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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