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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계장 앞에 있는 닭 한 마리를 구조했다. 처음에는 닭을 구조하기 위해 도계장에 간 게 아니었다. 도계장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그토록 참혹한 현장에서 동화 같은 일이 벌어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23일 DxE와 서울애니멀세이브 등 동물권 활동가들과 새로운 비질(도축장 등을 방문해 목격하고 기록해 공유하는 행동)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답사에 나섰다. 오전 8시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이동해 경기도에 있는 도계장 부근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초록빛의 논과 산, 맑고 푸른 하늘까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비질이라는 게 본래 죽음을 마주하는 자리이기에 가벼운 마음일 수 없지만, 풍경과 날씨 덕분인지 여행 온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정류장에서 도계장으로 걸어가는 길, 잡초들 사이로 새의 털이 엉겨 붙은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로드킬 당한 새의 오래된 사체로 짐작했다.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도로변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도계장 근처 길가 풀 위에 엉켜 붙은 닭의 털이 있다.
 도계장 근처 길가 풀 위에 엉켜 붙은 닭의 털이 있다.
ⓒ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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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장에 도착하고서 깨달았다. 우리가 본 엉겨 붙은 털은 로드킬의 흔적이 아니었다. 도계장으로 향했던 어떤 닭들의 흔적이었다. 도착한 도계장 앞에는 닭을 실은 트럭들이 대기 중이었다.

4.5톤 트럭에 약 3천 마리의 닭이 실려 있었다. 트럭에 실려 있던 닭은 평생 알을 낳는 강제노동을 하는 산란계였다. 무게는 약 1.7kg, 특대로 분류된다. 3천 명의 생명이 좁은 닭장에서 움직이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트럭 닭장에 가득 실린 산란계
 트럭 닭장에 가득 실린 산란계
ⓒ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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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춤을 추는 초록 빛깔의 나뭇잎과 푸른 하늘, 힘없이 처진 빨간 벼슬, 하얀 털의 수많은 닭. 눈물이 나오기는커녕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풍경에 입을 벌리고 생각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닭도 있었고 더위와 스트레스에 지쳐 풀썩 주저앉은 닭도 많았다. 이미 눈을 감은 채 숨을 거둔 닭도 보였다. 똥오줌, 깨진 알과 3천 마리의 닭이 섞여 고약한 냄새가 났다. 죽은 이에게도, 산 이에게도 그곳은 지옥이었다.
 
닭장의 산란계와 알
 닭장의 산란계와 알
ⓒ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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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만큼이나 알이 많았다. 닭장에는 알이 여기저기 닭들과 섞여 있었고 둥그런 알은 구르다가 땅으로 떨어져 깨지기도 했다. 바닥에는 깨진 알 껍데기들이 보였고 노란 물들이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노란색이 이토록 참혹한 색이었는가. 노른자 위에 파리들이 꼬였고 닭의 털들이 엉켜 있기도 했다. 트럭 위 계사에는 물도, 모이도, 화장실도 없었다.

알을 낳는 산란계가 도계장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농협 축산정보센터에 따르면 산란계 1마리는 1일 110g의 사료를 먹고 생후 146일부터 560일까지(414일간) 일생동안 347개의 알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1년 6개월, 최대 2년 정도 알을 낳는다. 사룟값 대비 알 생산 효율이 떨어지면 도계장으로 온다. 평생 알을 낳다가 결국 고기가 된다. 산란계의 1년 6개월 삶에 기적이란 존재할까.

기적

한참 비질을 할 때였다. 트럭들에 갇힌 닭들 사이로 자유롭게 땅을 거니는 닭이 보였다. 트럭에 실린 하얀 닭들과 색깔도, 크기도 달랐다. 갈색 빛깔의 아직 병아리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닭이었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닭들 사이로 뛰노는 닭이라니. 닭은 그곳이 어디인지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평온하게 이곳저곳을 누비기도 하고 한편에 마련된 모이를 먹기도 했다. 운송 기사들이 한편에 마련해준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랬다. 도계장에 들어가기 전 트럭에서 간혹 닭들이 빠져나오곤 하는데 보통은 다시 닭을 잡아 계사에 넣는다고 한다. 어찌 된 일인지 잎싹이는 살아남았고 결국 운송 기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열흘가량을 그곳에서 지냈다.
 
도계장 차량 대기 장소에서 열흘 가량 지낸 잎싹이
 도계장 차량 대기 장소에서 열흘 가량 지낸 잎싹이
ⓒ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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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 혜린은 닭을 구조하자고 했다. 나는 닭을 구조해서 추후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걱정되었다. '그곳에서의 삶이 도시의 방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머뭇거렸다. 나와 명일은 어찌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동안 혜린은 발을 동동 구르며 트럭 밑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잎싹이를 잡으려고 했다.

"주변에 고양이도 있고 도계장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나는 일단 구조해야겠어."

결국 우리는 일단 구조하기로 했다. 운송 기사에게 닭을 데려가도 되겠냐고 하자 운송 기사는 흔쾌히 승낙했고 그때부터 잎싹이 구조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닥치는 대로 자신의 동료를 잡아 내팽개치고 죽이고 먹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우리가 닭을 잡으려 할 때마다 닭은 다 자라지 않은 날개로 힘껏 날갯짓하거나 두 발로 콩콩 달리며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얼른 구조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론 안도했다. 힘차게 도망치는 모습이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몸을 웅크려 트럭 밑에 들어가기도 하고 풀숲을 헤치기도 했다. 우릴 지켜보던 운송 기사는 보다 못해 닭을 잡을 때 사용하는 쇠막대기를 건네주는 친절(?)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한 시간가량 쫓고 쫓기는 상황이 반복됐다.

'우리가 정말 닭을 구조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커질 무렵, 트럭 바퀴 위에 올라간 닭을 혜린이 두 손으로 낚아챘다. 죽이는 손이 아니라 살리는 손이었다. 몇 번의 푸드덕 날갯짓 끝에 활동가 혜린 품에 안긴 닭은 삐악삐악 소리를 냈다. 우리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활동가 혜린이 잎싹이를 구조한 뒤 품에 안고 있다.
 활동가 혜린이 잎싹이를 구조한 뒤 품에 안고 있다.
ⓒ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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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하는 동안 총 3대의 차량, 9천 마리의 닭이 도계장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구조한 닭은 사육장, 운송차, 그리고 도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생존자의 이름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에서 따와 '잎싹이'라고 지었다. 우리는 9천 마리의 닭을 무기력하게 보냈고 잎싹이 한 명만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택시 기사는 오늘 첫 손님은 강아지였는데, 닭 손님은 난생처음 태워본다며 신기해했다.

잎싹이

활동가 집으로 온 잎싹이는 침대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도망치느라 긴장하고 피곤했을 잎싹이가 심신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우리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10분이 지났을까. 옆방에 있던 잎싹이가 우리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잎싹이에게 쌀과 물을 건넸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백미, 현미, 퀴노아는 골라 먹었고 흑미는 먹지 않았다. 취향이 분명했다. '닭대가리'라는 단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잠시 후 잎싹이는 활동가 명일의 무릎에 올라섰다. 입이 떡 벌어졌다. 집에 온 지 불과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잎싹이는 우리의 팔과 등, 어깨에 올라섰다. 잎싹이 발을 통해 잎싹이의 온기가 전해졌다. '경계심에 숨어 지내진 않을까, 식음을 전폐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우리 넷은 어느새 서로의 몸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돌이켜보면 잎싹이에게 도계장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잎싹이를 만나기 전에 내가 알던 '닭의 세계'는 모두 무너졌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잎싹이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갈 동물해방의 여행이 기대된다. 그리고, 이 여행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활동가 명일의 무릎에 올라간 잎싹이
 활동가 명일의 무릎에 올라간 잎싹이
ⓒ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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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구조된 잎싹이는 당분간 활동가 자택에서 머물며 추후 거처를 정할 예정입니다. 도계장에서 나온 잎싹이의 새로운 삶을 위해 시민들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합니다. 건강검진을 비롯해 추후 거처 마련, 식비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이 글은 개인 브런치 계정에도 실립니다.

* 서울애니멀세이브 홈페이지 : https://linktr.ee/seoulanimalsave


태그:#잎싹이, #동물권, #비질, #서울애니멀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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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게 덜 폐 끼치는 동물이 되고자 합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보고 느낀 것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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