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 역을 맡은 배우 고두심.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 역을 맡은 배우 고두심. ⓒ 명필름

 
'방송대상 최다 수상자', '국민 엄마'로 꼽히는 배우 중 한 사람. 배우 고두심을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데뷔 50년 차라는 긴 연기 경력에도 이번 영화 <빛나는 순간>은 그에겐 떨리는 도전이었다고 한다. 단순히 제주를 배경으로 해서가 아니다. 대중에게 낯설 수 있는 고두심의 멜로 정서, 그리고 역사적 아픔을 겪은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쌓여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제주 해녀 고진옥이다. 툭툭 무심하게 뱉는 말이 거칠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따뜻한 마음도 담겨 있다. 마을 수호신처럼 자리한 진옥의 삶을 다큐멘터리 피디 경훈(지현우)이 카메라에 담고 싶어하지만 여의치 않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진옥과 그런 그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경훈 사이에서 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특별한 사랑 이야기보단 4·3의 아픔이 다가왔다"

'이게 웬 떡이야!'라고 짐짓 재치 있게 고두심은 출연 소감에 대해 운을 뗐다. 반 농담이었다. 30년 이상 차이 나는 연하의 남성과 사랑도 신선했지만, 정작 제주 사람들 마음에 깊이 자리한 민간인학살사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고두심은 끌렸다고 한다.

"우선 해녀분들의 혼과 정신을 가감 없이 표현하려 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 사랑 이야기도 좋지만, 그 안에 묻어 있는 제주의 풍광이랄까? 그런 게 와닿았다. 나보고 감독님이 제주의 풍광 그 자체라는데 그 말에 혹하지 않을 배우가 있을까. 처음 만난 날 제게 손편지를 주고 가셨다. 굉장히 길게 제가 이 영화에 나와야 하는 이유가 적혀 있더라."

영화에서 진옥은 4·3 사건에 부모를 잃은 아이로 묘사된다. 경훈의 카메라 앞에서 그때의 심경을 마치 반 실성한 듯 풀어놓는 진옥의 말은 대본에 있던 게 아닌 고두심의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제가 실제로 겪진 않았지만 몸으로 겪은 사람처럼 그 장면을 찍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며 고두심은 "6분 정도인가 원신 원컷으로 촬영했는데 마치 접신한 듯한 기분으로 말을 했다. 그 상처를 제가 오늘날까지 갖고 산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영화 <빛나는 순간> 관련이미지.

영화 <빛나는 순간> 관련이미지. ⓒ 명필름

 
제주에서 청소년기까지 보낸 그였기에 제주도 방언 연기도 문제될 건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해녀, 풍광은 이미 고두심이 온몸으로 기억하는 조각들이었다. 다만 하나 걸리는 건 물공포증이었다. 영화에서 직접 자맥질도 하고, 물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연기는 그런 공포증을 이겨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제주 사람이면 수영은 기본이라 생각하잖나.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배워서 할 줄은 알지만 자맥질은 안 배워봤다. 우리 집은 농사 짓는 집이라 바다와는 거리가 있었거든. <인어공주>라는 작품 때 한 커트를 찍으려고 잠깐 (자맥질을) 배우다가 물을 먹었다. 그 이후에 물을 무서워하게 됐다. 근데 이 작품은 해녀가 주인공이잖나.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면 망하겠다 싶었다. 나이도 7학년(칠십 대)이나 됐는데 뭘 몸을 사려! (웃음) 

게다가 제주 바다가 참 고향 같고, 함께 출연한 삼촌들도 베테랑이라 너무 든든했다. 나 하나 못 구해줄까 싶어서 맡겼지. 물 공포는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다. 근데 이번에 촬영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동백충이라는 게 있더라. 옻이 오르듯이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와 2주간 고생하긴 했다. 해녀 삼촌들이 동백기름을 바르라고 하더라. 역시 이미 겪어봐서 다 아는 거지."


50년을 돌아보다

나이 차 때문에 생경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과 경훈의 감정 교류는 중요한 지점이다. 고두심은 "(이런 나이 차의 사랑이) 흔하진 않지만, 특별한 경우엔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며 "어쨌든 여성 입장에선 여성으로서의 끈을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속마음을 표현했다.

"감독님이 사랑엔 치유의 속성이 있다고 하더라. 내가 상대를 만나, 그의 아픔까지 감싸주는 게 사랑이라는 거다. 진옥은 바다에서 아이를 잃었고, 경훈도 애인을 바다에서 잃은 아픔이 있으니 그런 상처를 치유받는 경험을 한 거지. 나이는 어쩌면 그냥 숫자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쥐고 있다면 특별한 사랑의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멜로 연기에 대한 갈망은 있었지, 젊었을 때에 기회가 온 게 아니니까. 그랬다면 눈에 맞는 사람이 생겨 결혼도 했을 텐데! (웃음) 그래도 내게 이런 순간, 기회가 오는구나 싶었다. 진옥이 마음이야 뭐 경훈을 따라 서울로 가고 싶었겠지만, 그런다 한들 무슨 신세계가 펼쳐지겠나. 그 할망은 물질만 하던 사람인데 한양에 가는 게 더 걱정이지. 그저 가슴에 몽우리가 지듯 그런 위안은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 역을 맡은 배우 고두심.

"나이도 7학년(칠십 대)이나 됐는데 뭘 몸을 사려! (웃음)" ⓒ 명필름

 
누구보다 부침 없이 인정받으며 걸어온 연기자 인생으로 보인다. 이 말에 고두심은 데뷔 초 이야기를 들려줬다. 19살에 제주를 떠나 서울로 온 뒤 4년간 한 중소기업에서 급사로, 비서로, 현금출납 담당 등으로 일하며 사회생활 하던 그는 문득 어릴 적 꿈이던 배우가 되기 위해 MBC 공채에 지원하고 덜컥 합격한다. 

"회사 생활 하다가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싶더라. 그래서 지원했지. 그때 MBC가 사무실 근처에 있었다. 정동이었으니. 내가 1513번인가 그랬는데 그 뒤로도 엄청 많이 지원했더라. 42명 합격자 중에 내가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큰 역할을 받았는데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대본리딩을 하는데 숨이 안 쉬어지고, 입이 안 떨어지더라. 그대로 뛰쳐 나가서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다. 그 길로 다시 회사에 복귀했지.

그러다 2년이 지날 무렵에 연출부 국장님이 날 부르더라. 그때 말씀하셨다. 공채 중 날 1등으로 뽑았는데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이런저런 핑계를 댔는데 그분이, 회사에서 널 주목하고 있는 거니 잘 해보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또 하게 된 거지. 제주도에서 홀로 올라와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 없이 그렇게 연기를 시작했다. 제가 눈에 확 들어오는 예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건강하고 강한 면모가 있었다. 그런 걸 봐주고 뽑아주신 게 아닐까 싶더라."


자신의 자리에서 오래, 열심히 최선을 다한 자에게 세상은 언젠가 반응하는 법이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배우상 수상에 축하문자를 보냈던 고두심 또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그는 여전한 연기 열정과 의지를 보였다. 올해 영화 1편, 드라마 1편 출연을 결정해 곧 촬영에 들어간다고 한다. 제주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와 치매에 걸린 엄마 역할이라는데 그의 또다른 변신과 도전을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겠다.
고두심 빛나는 순간 지현우 제주도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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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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