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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이 종교적 믿음에 따라 동성커플을 위탁부모 지정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관련 보도를 하는 <필라델피아인콰이어러>
 미국 연방대법원이 종교적 믿음에 따라 동성커플을 위탁부모 지정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관련 보도를 하는 <필라델피아인콰이어러>
ⓒ 필라델피아인콰이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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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미국 연방대법원이 17일(현지 시각)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커플을 위탁부모 지정에서 배제할 수 있다며 가톨릭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가톨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교구는 위탁양육기관 '가톨릭소셜서비스(Catholic Social Services, CSS)'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시는 CSS가 동성커플을 위탁부모로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를 차별이라 보고 계약을 중단했습니다. CSS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운영했다며 계약 중단은 위법하다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과 2심에선 시가 승소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재판관 9명의 만장일치로 시가 잘못했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은 "CSS는 종교적 신념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필라델피아의 아이들을 돌보려는 것"이라며 "다른 누구에게도 그러한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라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은 CSS의 결정이 결혼은 이성 간의 결합이라는 종교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시의 결정은 종교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 위반이라고 했습니다. 수정헌법 1조는 종교·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담은 조항으로 이 중 종교에 대해서는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종교 탄압을 피해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가 세운 나라인 만큼 종교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때문에 대법원은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에도 종교적 신념과 차별금지법의 원칙이 충돌할 때 종교적 신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8년 대법원은 동성커플을 위한 웨딩케이크 제작을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거부한 제빵사의 손을 들어줬는데 이 판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문제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예외를 인정하게 되면 차별금지법 자체가 효력을 잃게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판결이 주는 신호는 명확하다, 차별금지법에 위배되더라도 종교적 예외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한 버지니아 법대 미카 슈와르츠만(Micah J. Schwartzman) 교수의 말을 실어 비판했습니다. 

# 장면 2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이 14일 오후 동의 수 10만 명을 채웠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이 14일 오후 동의 수 10만 명을 채웠다.
ⓒ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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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찬성한 사람이 국회 소관상임위원회(법제사법위원회) 회부 기준인 10만 명을 채웠습니다. 국민동의청원이 접수되면 해당 상임위는 90일 이내에 심사를 마쳐야 합니다. 구속력 있는 제도입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지만 그동안 법사위에서 한 차례도 논의된 적이 없습니다. 국민동의청원이 성사되자 국회가 바빠졌습니다. 국민동의청원 성사 이틀 뒤인 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 22명, 열린민주당 1명, 무소속 1명 해서 모두 24명이 '평등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법사위는 두 법안을 신속히 심사해야 합니다.

법안 이름은 다르지만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과 평등에 관한 법률안은 내용이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성별·장애·나이·출신국가·종교·성적지향·성별정체성·학력을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법 제정까지 가장 큰 난관은 기독교 단체가 반발하는 성적지향입니다. 이 때문에 21대 국회 이전에도 여러 번 차별금지법이 발의됐으나 제대로 논의도 못해보고 폐기됐습니다. 기독교 단체들은 성적지향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이성애를 신의 질서로 보는 종교적 믿음을 침해하고 동성애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소속 회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평등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21.5.26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소속 회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평등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21.5.26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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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종교적 믿음 내세우지만

동성결혼이 합법이 된 미국에서나 차별금지법 논의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나 종교적 신념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앞서 미국의 사례에서 나온 제빵사의 경우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커플을 위한 케이크 제작을 거부했다고 해서 차별금지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됐습니다. 얼핏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을 처벌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이라고 예외로 두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교적 신념과 성적지향 차별 금지 원칙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까요? 무성한 말들을 다 걷어내면 결국 사회는 둘 중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는 <경향신문>에 "누구나 지금의 일상에서 밀려날 수 있고, 당장은 '차별받는 이'와 자신이 멀어보이더라도 어느 순간 강제적으로 그런 상황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시위하는 학생들을 보며 "부모가 뼈빠지게 일해 공부시켰더니 데모나 한다"라며 손가락질을 하던 어느 시장 상인이 대형마트가 들어선다고 하자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말처럼 누구나 약자가, 소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법은 나를 위한 법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반나치 운동가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는 그 유명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썼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톨릭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 입구의 양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구가 새겨 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하는 말로 지금은 내가 묘지에 누워있지만 다음은 당신 차례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겸손하라는 묵직한 의미이지만 한편으로는 수시로 바뀌는 개인의 처지에도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외를 적용해서 차별금지 원칙을 허물려고 하거나 아예 원칙조차 제정하지 못하게 하는 일부 종교계가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말입니다.

태그:#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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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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