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엉앙길
 엉앙길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화산절벽 가로 무늬
 화산절벽 가로 무늬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수월봉과 녹고물
   
옛날 옛날 고산리에 효심 깊은 남매가 살았다. 누이 이름은 '수월', 남동생은 '녹고'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앓아누운 뒤로는 그만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용하다는 의원도 손을 놓고 '몹쓸 병이 도질 징조'라면서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남매의 소식을 먼 곳에서 듣고 온 불심 깊은 스님이 묘법을 일러주고 갔다.

"일백 가지 약초를 한데 모아 달여 드려야 나을 수 있다네."

스님의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 남매는 백 가지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백록담에서 마지막 약초를 재취하고는 그동안 캐온 것들을 한데 모아서 살폈다.

"이럴 수가? 하나, 하나가 부족해. 오갈피야. 오갈피가 없어."

뒤늦게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을 안 남매는 오갈피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었다. 마침내 수월봉에서 오갈피나무를 찾았는데 그 나무는 낭떠러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무서울 것이 없었던 남매는 낭떠러지 쪽으로 뻗은 가지를 잡아당겨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만, 수월이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누나가 죽은 것을 안 녹고는 낭떠러지 아래를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렀다. 어찌나 눈물을 많이 흘렀는지 낭떠러지 사이로 스며들어 샘물이 되었다. 그 후 효심 깊은 남매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수월이가 죽은 곳을 '수월봉'이라 하고 낭떠러지 사이에 있는 샘물을 '녹고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수포구에서
 용수포구에서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12코스는 이야기 길이다. 먹구름까지 끼어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를 하기에 딱, 이다. 하지만 날씨 탓인지 나는 약간 멍한 상태로 녹남봉 아래 산경도예에 있는 중간스탬프를 그냥 지나쳐버리고 신포포구를 거쳐 수월봉에 이르러서야 정신이 들었는데 그것은 수월이가 떨어졌을 낭떠러지를 보고 나서였다.

그야말로 바다 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절벽 가득 겹겹이 쌓여 있는 가로 줄무늬에 할 말을 잃었다. 화산분출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규모의 화산절벽이었던 것이다. 비가 오면 물이 절벽을 따라 흐르고 절벽 곳곳에 녹고의 눈물이 모여서 맑은 샘물이 되었다는 '녹고물'이 있다. 절벽을 따라 '엉앙'이라는 산책로가 있다.

나는 '큰 바위, 낭떠러지 아래 길'이라는 뜻의 '엉앙길'을 제법 거친 바닷바람을 왼쪽 뺨으로 막아내면서 걸었다. 걷다 보니 차귀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이야기가 똬리를 틀고 있는 자구포구에 도착한 거다.

뱀, 뱀, 뱀
  
생이기정에서 바라본 풍경
 생이기정에서 바라본 풍경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차귀도가 보이는 자구포구에 도착하니 오래전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뱀을 숭배하는 곳에서 태어난 처녀가 육지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혼사를 치르고 신혼집으로 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가는데 뭔가가 자꾸 따라오더란다. 뭔가 싶어 뒤돌아보니, 물살을 헤치며 따라오는 것은… 뱀, 뱀들이다.

제주도 뱀 전설 중에서 여자가 결혼하면 따라가서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뱀신이 있다. 여성의 치맛자락을 따라다닌다는 이 뱀은 서귀포 토산에 있는 신당의 이야기이다. 제주도에 뱀을 모신 당이 몇 군데 있는데 토산 신당이 원조격이다.

모슬포에 살던 어느 할머니가 토산에서 며느리를 맞이한다. 기이하게도 며느리가 시집온 뒤부터 집안 곳곳에서 뱀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방에도 똬리, 곳간에도 똬리, 부엌에도 똬리…. 할머니는 그만 뱀에게 질려버린다. 쫓아도 다시 오고… 심방(무당)에게 고민을 털어놓기에 이르는데, 무당은 며느리를 멀리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들 내외를 일본으로 보내버린다.

뱀 신화의 함의
  
올레 화살표
 올레 화살표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모든 이야기는 동기가 있고 메시지가 있다. 토산리에 전해오는 여성 수호신 뱀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처녀 세 명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왜구들이 나타나 겁탈하고는 죽여 버린다. 억울하게 죽은 그녀들의 혼을 마을 사람들이 달래주자 그녀들이 뱀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토산사신'이라 부르며 당신(堂神)으로 모신다. 신기하게도 처녀들이 그곳에서 빌면 시집을 잘 갔다고 한다.

고산 자구내포구와 차귀도도 뱀과 관련이 있다. 적혀 있는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당산봉에 있던 당집 성황사엔 칠성배염, 칠성한집, 칠성눌, 뒷할망이라 하는 뱀이 떼 지어 살고 있으므로 포구 이름을 뱀귀신이라는 뜻의 사(蛇)귀포라 했다. 사귀포는 고산 마을 앞에 있으므로 고산포구라 한다. 또 이 고산포구에서 배를 타고 나가면 자귀나무가 많아 자귀섬이라 불리던 섬이 있는데 한편으로 뱀이 떼를 지어 살고 있으므로 비얌섬이라고도 했다. 섬 이름이 '차귀도'가 된 것은 고려 예종 때 일이다.'

마침내 뱀신을 모시는 당이 있었다는 당산봉에 올라 차귀도와 눈섬이 한눈에 보이는 '생이기정(새를 뜻하는 '생이'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해진 말.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이라는 뜻이다)' 길을 걸으면서 그 아름다운 풍광에 그만 저 바다에 빠져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먹구름이 걷히자 햇살이 바다를 온통 은빛 뱀 무늬로 빛나게 한다. 은빛 뱀이라.

뱀이라는 소재가 섬뜩하기는 하지만 슬픈 사실을 신화적으로 해석해서 뱀 이야기로 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여자들을 보호해야 할 사람들(남자들 대다수는 고기잡이하다가 뜻밖의 사고를 만나기 마련이다)의 죄책감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뱀들에게 임무를 대신 맡기고자 하는 마음의 투영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인지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기운'에 아까부터 나는 자꾸 뒤돌아봤다. 나를 보호해주려는 뭔가가 계속 따라오는 것 같은 이 기시감이란?
  
 벽장식
  벽장식
ⓒ 차노휘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태그:#제주올레, #하이킹, #제12코스, #생이기정, #수월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